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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니챈 Jul 25. 2023

보이지 않는 유전

"엄마는 언제부터 이불을 만드신거야? 다른 걸 하다가 갑자기 이불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는 어렵잖아."


나는 H에게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양복점에 취직해서 옷을 배울 수 밖에 없었던 아빠를 떠올리며 물었다.

H의 엄마는 맞춤 이불을 만들고, 나의 아빠는 패딩을 만든다.

두 사람은 모두 미싱과 옷감과 털이 가득한 작업실에서 일한다.

눈처럼 날리는 깃털을 뒤집어 쓴 채 만든 것들은 뽀얗고, 정교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 전에는 무슨...산악 학교에 다녔다고 했어."

"산악학교? 그런게 있어?"

"몰라, 나도 처음 알았어. 그래서 엄마한테 물어봤지. 거긴 뭐하는 곳이냐고."

"그래서?"

"'아니 뭐...그냥...산에 대해서 이것저것 배우는 거지' 라고 하더라."

"신기하다. 그래서?"


나는 연신 그래서를 외쳤다. 그래서, 어쩌다가 산악학교를 다니던 여자는 이불을 만들게 되었나.

남의 엄마의 지나온 삶에 대해 이토록 호기심을 갖는 것이 무례한 일인줄 알면서도 물어대는 내가 싫었지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H의 엄마에 대해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등산을 즐겨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화목하게 산다.

얼마 전 근교의 N시로 이사한 H네 가족은 넓고 화려한 그의 인간관계 덕분에 몇 달 동안 집들이를 했다.

덕분에 막 취직한 H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집안의 모든 의자를 빼앗겼다며 불평하곤 했었다.


H는 대화중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엄마를 잘 모르는 것 같아."


H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H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는 이 일을 하고 있었고, 가끔씩 다른 일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이불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 엄마가 이불을 만들었는지 H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대화 중에 문득, H가 잠시나마 치킨집 사장님의 딸이 되었던 일을 회상했다. 나는 물론 H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린 일이었다. 개업한 H어머니의 치킨집에 수줍게 방문했던 그 기억을, 친구들이 이제 치킨집의 자제가 되었으니 결혼정보회사에서 1등을 하겠다고 농담을 하던 기억을. 어릴 적 H의 집에 놀러갔을 때 거실에 있던 미싱이 생각이 났다. 내게도 낯설지 않은 미싱이었으니까, 기억할 수 있다.

젊을 때부터 계속 산을 오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순식간에 돌아올만큼 H의 엄마는 도전적이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안정을 추구하는 감성적인 가족 구성원과 자주 다툰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가, 어느 순간 깃털 속에서 살게 된 나의 아빠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대화 속에서 H는 나의 거울이었다.


나도 나의 아빠가 정확히 어쩌다가 옷을 만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H의 엄마가 산을 사랑하듯 노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것과 하나가 되기 위해 애쓴 젊은 날이 있었으며 '어찌 어찌' 지금의 길을 걸었겠거니 생각한다.

아마도, 사랑하는만큼 업으로 지속할 수 있는 행운같은 것이 조금 모자랐겠지. 누군가는 용기라 부르기도 하는 어떤 것들이,

하고 막연히 생각해본다.


아빠는 가족과 자주다툰다. 대체로 가볍지만 어느 날은 무겁다.

때때로 따뜻한 모닥불이었다가, 때때로 커다란 불길이었다 하는 아빠가, 과연 옷을 만드는 섬세한 작업과 어울릴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런 불같은 아빠의 성정을 나는 꼭 닮았다. 엄마는 내가 아빠와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불쾌해하는데 그것을 사실 제법 즐기고 있다는 것마저 나는 아빠를 닮았다.



-



"네가 온다고 설레서 지퍼를 거꾸로 달아버렸네."


패딩의 몸체와 모자를 연결하는 지퍼가 거꾸로 달린 것을 알게 된 아빠가 통탄스럽게 말했다.


"장인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아빠는 연신 중얼거리며 미싱 앞에 앉아 모자에 붙은 지퍼를 한 올 한 올 떼고 다시 붙였다. 손길이 닿는 대로 깔끔하게 떨어지는 지퍼가 신기해서 침을 삼키며 봤다.

미싱 옆에 달린 전구의 빛에 의지해 아빠는 지퍼를 달았다. 빠르게 움직이는 미싱의 소음이 라디오 디제이의 소리를 먹어버렸다.


신당동의 한 건물에 아빠는 새로 작업실을 열었다. 그동안 회사에서, 혹은 동료들과 함께 작업실을 운영하던 아빠는 아주 오랜만에 혼자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하는 아빠를 볼 수 있었다.


작업이 이루어지는 커다란 스탠딩 책상에는  옷감과 패턴을 그린 종이, 실과 핀들이 널려 있었고, 그 위로 조명과 스팀 다리미가 달려있었다. 이따금 아빠가 집으로 가져오던 몇 가지 도구와, 옷을 만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도구 말고도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다. 옷감을 양쪽에 고정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묵직한 물건이 있다는 것도 새로 알았다. 털을 다루는 공간답게 구석구석 작은 깃털들이 얹혀 있었다. 콧바람에도 나풀대는 깃털들이 어쩐지 그곳에서만큼은 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시덥잖은 말을 건네가며 묵묵히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봤다.


"이건 뭐야?"

하고 물으면 아빠는 시선을 계속 옷에 둔 채 설명해줬다.


모자를 고쳐 다는 것을 끝으로 또 하나의 옷을 완성한 아빠는 새롭게 옷을 만들었다. 옷이란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패턴지를 오리고, 그 에 맞춰 옷감을 자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옷감을 고정하는 무거운 추를 양 끝에 대고, 유연한 곡선을 따라 가위가 매끄럽게 지나며 옷을 자른다. 조각조각 잘린 옷감은 소매나 허리끈이 되고 다른 것들도 생김새에 맞게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옷감을 모두 자를 때까지 아빠는 멈추지 않았다. 서서하는 작업임에도 집중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 과목을 오래 공부하는 고시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무언가에 몰두할 때 숨을 참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간식을 먹는 일도, 정확하고 건강한 타이밍에 화장실을 가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은 아빠가 내게 가르친 것이 아니었지만 나는 똑닮은 습관을 갖고 있었다. 한 집에서 보고 배운 성질머리 외에도 내가 아빠의 딸이라는 새로운 증거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새로운 문법을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을 두칸씩 오르는 것도, 그러느라 앞쪽으로 몸이 조금 숙여지는 것도, 집에서 보지 못한 아빠의 자잘한 일상과 습관은 내게 그대로 유전되었다. 이제 나는 빠르게 집으로 가다가도, 무언가에 몰입하다가도 어느 날은 아빠를 생각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빠는 왜 빠르게 걷게 되었나.


살면서 남은 시간동안 아빠를 다 알 수 있을까 생각한다. 아마도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그러니 부지런히 물어보아야겠다. 살아온 날들에 대해, 내게로 유전된 빠른 걸음의 유래에 대해, 숨 쉬지 않는 몰입에 대해. 보이지 않는 유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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