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Essay 글을 쓰는 일 / Editor. Cholog
종종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을 나눠야 할 때 침묵으로 고민하는 시간을 벌어보지만,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은 ‘뭐야. 뭐야. 뭐라도 떠올려. 시간이 가고 있어. 빨리빨리’를 외치다 이내 곧 ‘망했다, 망했어’의 도돌이표다. 사람들 앞에서 말로 산문을 쓰는 재주는커녕, 조리 있게 끝맺는 법도 모르는 하찮은 인간으로 멍청하게 서 있는 것이다. 특히 말 못 하는 인간이 긴장까지 하면 목소리만 커져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머저리가 된다. 인터스텔라처럼 먼 미래의 내가 나타나서 No! No!! No!!! 외쳐주길 바라며 떠드는 머저리. 또는 말하다가 튀어나오는 감정에 져서 눈물도 흘린다. 울음 섞인 말은 사실 말이 아니라 배출이 아닐까 싶을 만큼 끔찍하기 그지없다. 결국 한심함으로 점철된 나에게 남은 것은 이불킥과 낯부끄러운 후회뿐이니 더욱더 입은 꾹꾹 마음도 꾹꾹.
이러니 말보다 쓰는 일은 나를 좀 더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머저리가 아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해 준다. 그렇지만 모든 순간마다 글로 대처할 수는 없는 일. 나는 오늘도 인간의 모습에서 한 걸음 멀어졌고, ‘대면보다는 비대면’을 외치며 사회성은 두 단계 하락했다.
어느 날 엄마가 칸이 나뉜 커다란 노트를 가져와 릴레이 편지 쓰기를 하자고 했다. 예를 들어 가족별로 각자의 공간이 있고 그곳에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식이었다. 나는 주로 반성문을 썼다. 혼자 쓰는 일기장도 누가 볼까 겁이 나 적당히 끄적이던 나에게 공개편지란 쑥스럽고 퍽 민망한 일이었다. 애정 어린 글을 다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지 싶어 애꿎은 미안함만 토로했다. ‘엄마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동생이랑 안 싸울게요.’ 같은 문장들이 주를 이뤘다. 그에 반해 엄마는 항상 장문의 편지를 남겼다. 어느 날은 엄마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를 설명해 주기도 했고, 회사에서 무언가를 보고 왜 내가 떠올랐는지 말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늘 잊지 않고 사랑을 전했다.
부끄러움을 감내하며 마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못난 나를 데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자주 버거웠다. 솔직하지도 못한 인간이 회피형이기까지 한다면 어떻게 될까. 속수무책으로 찌질해지는 것이다. 내가 나인 것이 분명한데 나도 나를 피하고만 싶어 상처가 되는 말만 쏙쏙 골라 아무렇게 던져버리고 도망친다. 무심코 던진 말로 한순간에 망가진 것들을 보며 홀로 훌쩍이다 슬쩍 사과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이런 나도 정말 괜찮은 걸까. 자아 성찰이 시작된다. 무엇이든 펴서 생각 회로를 더듬더듬 써 내려간다.
그러니까 쓴다는 건 백날천날 사춘기처럼 요동치는 감정에 휩쓸려가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마음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기억들, 쓰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나를 두 발로 우뚝 서서 똑바로 바라봐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전하고 싶어 쓰기를 택했다지만, 사실은 글을 읽은 누군가의 이해를 내심 바라기도 했다. 나도 날 애써서 이해하고 있다고. 내 마음은 이게 진짜였다고, 그러니 상처받지 말라고. 나도 보지 못했던 진심을 이제야 마주하게 된 거라고. 나는 늘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고. 멋쩍어 꺼내지 못한 사랑을 여기서 말하고 있었다고.
불투명했던 마음이 점차 또렷해진다.
마주 보아야 할 일을 마주 보지 않을 땐 그것이 마치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슬퍼야 할 일이 슬프지 않거나, 한심했던 일이 한심해지지 않기도 해요. 그래서 어딘가에는 인정한 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내면 바닥에 숨겨진 마음들을 모두 모두 긁어모아 내뱉다 보면 지나버린 모오든 순간에서의 나를 언젠가 이해할 수 있겠죠.
Local Editor Cholog 초록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