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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입니다 Dec 07. 2020

퇴사에 걸리는 시간, 15분 -Ⅱ

2020년 12월 06일 일요일

날씨 : 흐리고 추움

기록자 : 뽈





6.

“반가워. 바에 관해서야 이미 대부분 알 테고. 우리 칵테일 메뉴를 본 적 있니?”


그럼, 있지. 진작부터 하려던 것을 미루고 미루다 출근 이틀 전에야 제대로 확인했지만. 한국에서 일했던 때와 록다운 이전에 로비 바에서 솔로 바텐딩을 했을 땐 써본 적 없는 가니쉬와 쥬스, 리큐르, 스피릿들이 꽤 있었으나, 벼락치기로나마 대충 숙지해온 덕에 진도가 빨랐다. A의 조력 하에 시그니처 칵테일들을 하나씩 차례로 만들어 보면서 배합 비율을 적고 생소한 리큐르들은 맛을 본 뒤 노트에 기록했다.



다음으로는 바백과 바탑 위 리큐르와 스피릿들이 놓인 위치라든가 와인, 셀처, 쥬스 등 각 냉장고 속 내용물들과 쓰임새를 파악하고 바 곳곳을 눈으로 익히며 외웠다. 이들이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체크하고 리필할 때 다녀와야 하는 창고도 살폈다. 사실 이런 유의 일이란 암만 머리로 외워봤자 말짱 도루묵이다. 정신없이 바빠서 끊임없이 만들고 여러 번의 실수를 거치며 몸에 익어야 느는 법이니까. 아무튼 한가한 덕에 세 시간의 트레이닝이 무난히 끝났다. A에게 R 바에서 일하던 많은 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바텐더 셋을 제외하곤 모두 해고됐어. 네가 이번에 합류한 거고. 우리가 이제 웨이터 일도 해야 해.”



7.

둘째 날은 바빠서, 아니, 객관적으로 바빴다기보다 적은 인력에게 멀티플레이어 역할이 요구되다 보니 손님이 조금만 몰려도 각자 종횡무진으로 움직여야 해야 해서, 당초 배정받은 근무 시간을 초과해 일하게 됐다. 확실히 일을 본격적으로 해보니 보이는 게 많았다. 내가 지금까지 일해온 방식과도 많이 다름을 느꼈다. 구체적인 것은 아래의 <흥미로운 점> 잡설 모음 참고. 흥미 없는 분들은 스킵하시길.  


흥미로운 점 1)

나의 아주 협소하고 알량한 바텐딩 경험치 내에서 주로 접하고 만들어왔던 칵테일과 영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칵테일 종류가 꽤 다르다. 개중에서도 눈에 띄는 뉴페이스는 ‘폰스타(=포르노스타…;) 마티니’. 한국에서는 일하던 바, 놀러 간 바 어디에서도 들은 적, 본 적 없으며 다른 손님이 주문하는 모습조차 목격한 바 없었던 칵테일로, 솔직히 여기서 처음 알게 됐다. 바닐라향 보드카(혹은 노멀 보드카에 바닐라 비터나 리큐르를 첨가하기도)와 패션후르츠 퓨레, 사과쥬스, 레몬쥬스 등을 넣어 만드는 술인데 실제로 주류전문잡지 <The Drink Business>에 따르면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칵테일’ 1위에 2년 연속 폰스타 마티니가 선정됐다고. 맛이야 뭐, 재료 보면 답 나오는 맛. 새콤하고 상큼하고 달고 쥬스까지 들어갔으니 맛없기 힘든 부류. 비슷한 격으로 ‘섹스온더비치’도 인기가 좋다. 그 외 주문량이 많은 나머지 칵테일들을 훑자면 ‘롱아일랜드아이스티’나 ‘좀비’ 같은 고도수 폭탄주(소맥의 고장 한국에선 낮은 인기...;)라든가 ‘마가리타’, ‘에스프레소 마티니’, ‘아페롤 스프리츠’ 정도. ‘올드패션드’나 ‘드라이 마티니’, ‘맨하탄’ 등 클래식 칵테일 주문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드물다. 정말 올드-패션드라 이건가… 뭔가.  


폰스타 마티니. 이미지 출처는 구글


흥미로운 점 2)

영국 펍과 바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가장’ 흥미롭고 놀라운 점. 주문하는 이도, 만드는 이도 ‘진토닉’을 칵테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진토닉을 주문하면 하이볼 글라스에 얼음 대충 넣고 진을 슉 따르고 라임이나 레몬 웻지 하나 툭 얹은 뒤 토닉 워터를 따로 내민다. 글라스 칠링(술을 붓기 전에 잔을 차갑게 만드는 일)이나 라임 스퀴징(라임즙을 짜내는 일)이나 믹싱(토닉워터를 넣은 뒤 술과 잘 섞이도록 살짝 젓는 행위) 따위 없다. 펍에서 처음 진토닉을 주문받아 만들었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토닉워터를 얼음 위에 붓는 순간, 옆에 서 있던 매니저가 나를 가로막았다.


“토닉 워터는 병째로 서브해. 절대 섞지 말아.”
“엉...? 왜지?”
“고객이 토닉 워터 병값까지 다 지불했기 때문이지.
게다가 넌 이 사람이 좋아하는 진:토닉워터 비율을 모르잖아. ”


말인즉 ‘고객님 입맛대로 섞어 드세요’라는 것인데, ‘아니, 누구든지 맛있게 마실 수 있는 비율로 만들어주면 되는 것 아냐..?’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하라는 대로 해야지. 게다가 나를 제외하곤 이런 서브 방식에 대해 고객이든 바텐더든 전혀 괘념치 않는다. 진토닉뿐 아니라 비슷한 유의 하이볼 스타일 칵테일들을 서브하는 방식도 마찬가지.


흥미로운 점 2 +a)

그렇대도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을 진토닉으로 꼽는 사람으로서는 조금 황당하다. 시무룩해지는 부분(앗, 그래도 진토닉의 종주국인데 어째서 이렇게 대충...)이고, 개인적 편견일지 몰라도 무성의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어쨌거나 이들이 제공하는 진토닉 가격이 9~10파운드 선인데, 맥주나 와인 등의 다른 음료와 비교할 때 결코 저렴하지 않거든. 내가 일해온 곳들이 보통 캐주얼 콘셉트라 이렇게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모르겠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바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게 되는 언젠가 기필코 밝혀내리.


흥미로운 점 3)

같은 칵테일이라도 바텐더마다 메이킹 방식이 다른데 어느 쪽이든 존중받는다. 일례로 바텐더 A는 폰스타 마티니를 만들 때 앱솔루트 바닐라 보드카와 라임 쥬스를 쓰고 잘게 부순 얼음을 이용해 셰이킹하는 반면 또 다른 바텐더 G는 일반 보드카에 바닐라 비터를 섞고 레몬 쥬스를 넣으며 큰 얼음으로 셰이킹한다. 서로의 칵테일 실력에 관해 기본적 신뢰가 깔려있는 데다 ‘이건 내 방식이고 저건 쟤 방식. 뭐든 고객 입에 맞기만 한다면 무슨 문제라도?’ 주의인 듯. 다만 동일한 고객으로부터 동일한 칵테일 리오더가 들어오는 경우 맛의 일관성을 위해 A든 G든 특정한 바텐더 한 명이 계속 만든다.


흥미로운 점 4)

런던에서 활동하는 바텐더 중에는 이탈리안이 정말 무지 엄청 되게 진짜 많다. 메인 바 R에서도 나를 제외한 모두(심지어 매니저까지)가 이탈리안이었음.



8.

지금부터는 힘들었던 점.


1) 달리는 피지컬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 아등바등 움직였더니 그 짧은 새 몸이 눈에 띄게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 호텔은 기차역과 붙어있는 건물이자 옛날 옛적에는 병원으로 쓰였다. 바가 있는 이 공간은 병동이었고, 호텔로 개조된 후에도 오랫동안 다른 용도로 기능했다. 한마디로, R은 애초에 바로써 설계된 공간이 아니다. 일하는 동선이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 소다나 토닉, 콜라와 같은 믹서 음료부터 과일, 리큐르, 와인 등 바에 필요한 물품들을 리필하러 가야 하는 창고는 주방 안쪽에 위치하는 데다 바 공간 자체가 커서 멀다. 24병씩 들어 있는 음료 상자들이 무겁기는 또 좀 무거워야지. 고작 음료 몇 상자 옮겨오는 일에 다른 이들보다 배의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서양인 남성의 평균 키에 맞춰 높이를 설계했는지 뭔지 바가 너무 높다. 내가 진짜 한국에서 작은 키는 아닌데(...진짜임) 일곱 시간 내내 까치발을 서야 했다. 특히 와인잔을 꺼낼 때 랙에 손이 닿질 않아 낑낑대다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수시로 생기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한가할 때야 괜찮지만 쏟아지는 주문을 쳐내야 하는 때에는 이런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요청받는 일도 성가셔진다. 달리는 피지컬은 능력 밖의 불리한 조건. 그러잖아도 이 팀에서 혼자 여성이라 시답잖은 배려도 괜히 불편한데 앞에서든 뒤에서든 불필요한 소리까지 듣긴 싫어서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몸을 재게 움직였다. 네가 두 발짝 움직일 때 나는 네 발짝 먼저 움직여 있겠다. 네게 10초 걸리는 일이라면 내가 5초 만에 준비해주지, 란 마음가짐으로. 문제는 마음가짐과 몸 사이의 협상이 덜 된 거지. 불편한 단화를 신은 채 까치발까지 들고 서있다 보니 나흘 만에 이상 조짐이 생겼다. 오랜 지병을 가진 허리가 꺾이며 저리기 시작했고 일을 시작한 다음 주부터는 왼쪽 다리를 절다시피 했다.


2) ‘Skeleton Team’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서비스의 질적 저하를 모른 체 하고 일하기가 솔직히 어려웠다. 모든 부서의 인력이 최소한으로 줄었기에 한 명이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일한다. 개개인이 최선을 다해 일한다손 치더라도, 내 잘못이 아니라도 여기저기서 에러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업장의 입장일 뿐. 가격을 그만큼 낮추지 않는 한 고객이 알 바가 아니다. 이전과 동일한 가격을 지불하면서 질 낮은 서비스를 받는 일에 기꺼이 수긍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체 가격의 12.5%(런던 대부분의 레스토랑 혹은 바가 그렇지만)가 서비스 차지로 추가되는 5성급 호텔 A의 메인 바 R에서 주문한 디너 요리가 50분이 지나도록 깜깜무소식이라면? 환장할 노릇이지. 바텐딩을 하면서 담당 웨이트리스까지 하는데 주방과 바를 수시로 오가며 안달복달 체크하고 고객의 기분을 살피고 여러 차례 사과하는 내 입장도 환장할 노릇. 5성급 호텔 요리라 불릴 수 있을 수준의 농어 스테이크와 수제 와규 버거와 양갈비 요리와... 등등 여섯 접시를 혼자 해치워 내야 하는 셰프 입장도 환장할 노릇이다. 그러나 사실 누구보다 환장할 노릇인 이는 고객이다. 외국인들이 아무리 느긋한 편이라지만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지. 이런 일이 한두 차례로 그치지 않고 하루 한 번씩은 있게 되자 일할 때 텐션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나는 내가 속한 업장의 청결도를 비롯해 우리가 제공하는 음식과 음료의 질이 서비스의 전부라는 주의다. 친절이나 재치는 그외 재량이고 플러스알파의 영역. 그런데 이 원칙이 침해당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발생하자 이해가 가면서도 힘겨웠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당당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잖아.


3) 망할 놈의 ‘Skeleton Team’ 때문에 하루 중 주어지는 휴식 시간은 고작 30분. 그나마 짬이 좀 있는 애들은 담배 태운다는 명목으로 중간에 십 분씩 나갔다 오길래 나도 그냥 담배를 태울까, 하고 짧게 생각할 정도였다. 직원 식당에는 진정 먹으라고 내놓은 건지 싶은 음식이 소량 있고 식사 때가 아니면 그마저도 없다. 물 한 병마저 주질 않는다. 굶으란 소리지 뭐.


4) 3월의 1차 내셔널 록다운을 한 달 겪고 한국에서의 자가격리까지, 6주를 홀로 갇혀서였는지 바깥에 나가는 일이 한동안 버거웠다. 바이러스를 떠나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불안하고 어지러워서 식당이나 카페 이용을 자제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넉 달간 한국에서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같은 얼굴색에 비슷한 생김새를 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얘기고. 여기서 나는 여전히 눈초리를 받는 이방인이란 사실을 까먹은 게지. 더욱이 내가 일하는 이곳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술을 마시러 오는 곳. 바텐더 중 내가 가장 영어에 약하기도 하고, R 스타일의 바텐딩을 아무튼 빨리 익혀야 했기 때문에 웨이팅보다는 주로 바 안에서 칵테일 메이킹을 하게 되긴 했지만 한껏 치장하고 멋 부린 이들이 불콰하게 취해서는 깔깔거리며 웃고 소리를 치는 난장 속에서 트레이를 들고 오가는 일이나 그들과 말을 트는 일, 유독 억양이 센 영어를 하는 중년들을 응대하는 일에 예전과 다르게 지쳤던 것 같다. 바 안에서는 웃으며 일을 잘하다 난데없이 숨이 가빠져서 서둘러 창고에 숨어 컥컥대거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는 일이 생겼다.


5) 사실 나는 어디 가서 직업을 바텐더라고 소개할 수 있을 만큼 바텐딩을 오래 하지도 않았고,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현란한 스킬을 가진 것도 아니고 방대한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지도 못하며 직업의식으로 충만하지도 않고 엄청나게 맛있는 칵테일을 만들 줄 아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바텐더 일을 하게 된 건 궁금해서였다. 새로운 걸 배우고 싶어서. 크래프트맥주에서 촉발된 오랜 관심사가 어느 순간부터 위스키랑 칵테일을 좀 알고 싶은 마음으로 옮겨갔는데, 알려면 자주 마시고 자주 봐야 하고 그러려면 일을 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한국에서 일했을 때는 그래서 재밌었다. 개인 업장이라 더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사장도 나도 배움에 지불하는 시간과 돈, 술에 인색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호텔은 다르다. 기업 개념이다 보니 새로운 리큐르나 진을 뭐 하나 들여볼래도 그래야 하는 이유를 일일이 문서화시켜서 보고해야 하고 그게 매니저와 제너럴 매니저를 거쳐 통과하면 레시피를 만들어서 상사들의 시음을 통과해야 하고, 최종 승인을 받아야 메뉴에 올릴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상사가 어느 정도 열린 마인드를 가진 이라야 가능한 것. 대부분은 그런 귀찮은 일을 하려고 들지 않는다. 장사가 잘될 때는 지금도 잘되는데 뭐하러, 라서. 지금 같은 시기에는 장사도 안 되는데 뭐하러, 라서. 그런 환경에서 일개 바텐더가 굳이 뭘 시도할 수 있겠는가. 더 큰 문제는 업장의 시설물이나 기물에 대한 투자 역시 인색하다는 점. 5성급 호텔 바에 제대로 된 과일 필러 하나 없는 게 사실인가요? 칼과 도마가 5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바꾸지 않는 게 사실인가요? 개인 기물을 따로 들고 다녀야 하는 게 사실인가요? 음료 냉장고 문의 아귀가 맞지 않아 여닫을 때마다 손톱이 부서질 것 같은데 한 달 넘게 고치지 않고 쓰는 게 사실인가요? 구비하고 있는 위스키와 진의 종류가 고작 이 정도인 게 사실인가요? 다른 나라도 아닌 영국에서! 후우...


그래도 올해 초에는 로비 바 메인 바텐더였던 F를 도와 이것저것 새로운 진과 리큐르를 들이는 것을 제안했었고 새로운 시그니처 칵테일을 설계했었고 승인까지 받았었다. 록다운으로 다 망했지만. 아, 다른 얘기지만 F는 심지어 R에 바텐더로 오지도 못했다. 않았다, 인 줄 알았는데 못했다, 가 맞았다. 돌아온 뒤에, 일하는 동안 그를 두어 번 마주친 일이 있는데 그는 카페 섹션에서 호스트를 하고 있었다. 커피잔이나 포크, 나이프 따위를 닦고 있었다. R의 기존 바텐더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게 작용한 것 같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런 시국에도 정치질인가. 웃기는 일이다. 우스운 일이다.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가끔 F를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웃음을 지었고 그런 내 모습도 역시 우습다고 생각했다.


6) 기계적인 바텐딩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시그니처 칵테일 메이킹에 익숙해지는 건 삼 일로 충분했다. 문제는 정말 메이킹만 한다는 것. 나는 마주 앉은 고객에게 그가 좋아할 만한 술을 추천하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성심성의껏 만든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골라내어주며 즉각적인 반응을 슬쩍 확인하고 또 이야기하는 일이 즐거웠던 건데, 이곳의 시스템에선 그게 불가능하다. 테이블에 가서 주문을 받는 이는 웨이터고 나는 티켓에 적힌 음료를 제조해서 내보내면 그만이다. 그래. 나는 음료 제조기다. 이 음료를 시킨 이가 누군지, 브랜디 베이스의 칵테일을 즐겨 마시는 홀로 온 중년 남성인지, 도수가 높지 않으며 상큼한 열대과일 맛을 좋아하고 칵테일을 경험해본 일은 몇 번 없는 이십 대 여성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얼굴도 알 길이 없지. 그런 건 재미가 없다. 바쁠 때 음료를 막 뽑아내는 행위 자체가 잠시 즐겁긴 해도 지나고 나면 그냥 그렇다. 애프터 피드백을 알 수가 없으니까. 물론 음료를 내보내기 전에 나도 맛을 보고, 다른 바텐더들도 맛을 보고 오케이 하지만 그건 우리 입장. 나는 돈을 내고 음료를 받아 마시는 저 사람의 생각이 궁금한데. 하다못해 첫 모금을 마신 후의 표정이 궁금한 건데. 알 수가 없으니 매력이 없다.


7) 침몰하는 배. 바 R뿐 아니라 호텔 전체가 침몰하는 배처럼 보였다. 나는 악사가 되지 못할 테니 탈출한다. 결국은 또 도망치는 것.



9.

내게 남은 영국의 시간은 길어야 일 년. 차라리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조금 더 편한 일을 찾아 하면서 남는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지내는 편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까치발 음료 제조기가 될 바에야 가보고 싶었던 바에 가서 칵테일 한 잔을 마셔보는 게 낫지. 이런 시기에 어디서 다시 일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지만 어차피 상황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남는다고 반드시 안전한 것도 아니고, 이래저래 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체없이 메일을 작성해 인적자원팀에 보냈다. 이 나라에서는 해고든 퇴사든 알리는 노티스를 최소 4주 전에 줘야 한다. 퇴사 사유는 적어도 되고, 적지 않아도 된다. 메일을 날린 지 십 분 만에 매니저 C에게서 바로 개인 메시지가 왔다. 메일에는 적지 않은 퇴사 사유를 그에게는 대략 설명했다. C는 수긍했고, 바로 다음 주부터 스케쥴표에서 내 이름이 빠졌다. 그룹 채팅방에서 탈퇴한 뒤 Y에게 미처 가져오지 못한 내 기물을 챙겨달라는 부탁을 했다.


뭐... 재미는 있었어


10.

2019년 10월 9일은 ‘호텔 지원 서류가 통과되었으니 트라이얼과 면접일을 잡자’는 메일을 받았던 날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2020년 10월 9일에는 마지막으로 회사에 들러서 절차상 남은 일들을 처리했다. 유니폼과 뱃지, 아이디 카드를 반납하고 사물함을 완전히 비웠다. 막 입사하고서 이것저것 적어가며 달달 외웠던 메뉴판과 새로 만든 칵테일 레시피를 메모해둔 종이 쪼가리들이 해진 채 남아있었다. 챙길까 잠시 고민했지만 굽이 닳은 단화와 함께 쓰레기통에 넣었다.


바 R의 외관. 이미지 출처는 구글.
코로나로 바 체어를 다 치워버린 것도 퍽 아쉬웠던 점. 그러지 않았다면 좀 더 일했을까.


퇴사를 위한 절차를 모두 이행하셨습니다. 절차 완료에 완전히 동의하십니까?


서명을 하고 C와 짧게 인사한 뒤 일식당 M과 바 R에 잠깐 들러서 미리 사 온 쿠키를 건네며 작별 인사를 했다. 15분이 지나있었다. 고작 15분. 어찌저찌 일 년 가까이 이곳에 적을 두고 지냈다. 아쉽다.


“We’re so sad to lose you.

But It’s a good choice anyway. you’ll be always good as you were before.”


쿠키를 받아든 A가 말했던 것처럼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 알게 될 날이 올까.

나는 이제 또 어디로 가게 될까. 두 달이 지난 지금은 일단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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