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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 Jun 14. 2024

지금, 왜 동학인가?

최제우의 혁명성

혁명은 1%의 희망으로부터 출발한다.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것을 설득하며 이뤄나가는 것.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랬고, 군사정권 아래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랬다. 19세기 중반, 성리학 500년의 전통에서 반기를 들고 나선 사람. 최제우.


세도세력의 부패와 왕실까지 공모한 민중 수탈은 극에 치닫고 있었다. 대동법이나 환곡과 같은 좋은 제도가 할당제로 바뀌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집을 떠나게 만들었다. 가진 자들은 서원이나 향교에 이름을 적어넣어 군대에 가지 않았고, 요호부민들은 탐관과 결탁해 세금을 내지 않았다. 향약과 향회에서 사대부들은 탐관들에게 항의해 보았자 피해만 본다는 것을 알고는 슬그머니 제 역할을 포기했다. 그러자 유계춘과 같은 향반(몰락 양반)이 향회를 주도하며 진주민란을 일으켰고, 그해 70여 곳에서 민란이 들불처럼 번졌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줄 정신적 기둥이 없었다. 그럴 즈음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어설픈 기독교 교리로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자들이 중국인들을 거듭 농락했다. 그때부터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를 넘보기 시작했다. 최제우는 몰락해 가는 나라에 희망을 주고 싶었다.


19세기는 가혹했다. 정조 임금이 죽자 이 나라에 희망이 사라진 듯이 보였다. 정약용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읽고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상제’를 대입시켜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대역죄인이 되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래도 그는 유배 중 수많은 저술을 통해 정치가의 태도를 지적하고 토지제도의 개선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세도세력의 문제점은 고쳐지지 않았고 곡식 생산량은 세종 시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위정척사파나 양명학자들이 개선책을 내놓았으나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이미 서학은 호남과 호서 지역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고, 최제우는 주리론을 뒤집어 ‘지기(至氣)’로 리(理)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동학을 선언했다. 그것은 ‘至氣’의 하느님을 우리 모두가 가졌다는 선언이었다.


1860년 동학의 원리를 깨친 최제우가 1861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했으니 그가 활약한 기간은 기껏해야 2년 반 남짓하다. 그는 경주에서 주로 생활하다가 남원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완성한 뒤 1863년 12월에 체포된다. 예수가 활약한 기간보다 짧은 그 기간에 그는 직접 포교하고, 책을 쓰고, 후계자를 정했다. 그는 아버지의 동지들이기도 한 영남 남인들과 토론하고자 했으나 바리새파와 같은 율법주의자들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유교 원리주의자들은 최제우를 이해하지 못했고, 서학을 퍼뜨리는 자로 보았다. 그들은 최제우가 유학자의 세상을 끝내고 이 땅에 동학으로 천민과 여자들까지 하나가 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 의도를 곡해했다.     


동학은 종교가 아니다. 적어도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에 이르기까지 ‘원동학’은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 할 보편적 길을 제시하는 학문”(박맹수)이었다. 따라서 ‘동학을 믿는다’가 아니라 ‘동학을 한다’, ‘동학을 실천한다’고 해야 했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나아가고, 증산교, 원불교 등으로 변신했을 때부터 종교가 되었다. 동학이 ‘시천주(侍天主)’를 주장할 때 민주주의와 평등의 원리가 되고, ‘보국안민(輔國安民)’과 ‘다시 개벽’을 주장할 때 나라의 개혁과 혁명의 원리가 되고,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주장할 때 공동체주의, 사회주의 원리가 되었다. 한편 그것이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또는 ‘천지부모(天地父母)’라고 말할 때 생명주의, 생태주의로 나아갔다.


리(理)의 위치에 ‘지기(至氣)’를 올려놓고서, 주문과 기도를 하면 하느님을 자신의 내부에 모실 수 있다는 말은 혁명적이었다. 그것도 마음만 바르게 먹으면 모실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로 인해 사람들은 신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대등해졌다. 그것은 소외받던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하느님을 모시면 억압받고 고통받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누릴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수심정기(守心正氣), 즉 마음을 지키고 바른 기운만 얻게 되면 누구나 하느님을 모시게 되고, 그런 가운데 함께 나누면 믿음의 공동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퇴계와 다산도 결코 생각해 보지 못한 놀라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남 남인들은 당황했다. 아무리 남인이 노론 세력에 몰려 세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서학을 흉내낸 최제우의 위험천만한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남인 계열인 유형원, 이익, 정약용의 논리를 훨씬 뛰어넘었고, 아니 허균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논리였다. 허균이야 서자를 없애자는 정도에서 유학자의 세상을 옹호했지만, 최제우는 천민과 여자들까지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그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즉 나라의 시스템을 뜯어고치자고 말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성리학의 시대를 끝내자는 소리였다. 영남 남인들은 그것을 역모로 받아들였다.      


동학은 새로운 제안이었다. 지상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외침이었다. 각자가 자신의 삶을 찾고 주체가 되면, 함께 힘을 합해 나라의 시스템을 뜯어고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내부에 하느님을 모시자는 최제우의 발언은 서학처럼 ‘야훼’를 믿고 공경하자는 것이 아니라, 몸속의 자연 혹은 신성을 깨우쳐 정성과 공경의 공동체, 신명의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각자 ‘내 속의 하느님’을 가질 때 너와 나는 하나가 되고 우주적 에너지로 충만해진다. 그러니 먼 곳에 있는 신(야훼)에게 애원하기보다 내 몸속에 있는 신(至氣)을 따르고 누리라는 것이다. 지기(至氣)는 명령하는 서구적 인격신이 아니라 바로 인간 존재의 심층에서 생성되는 신바람나는 신이었다. 그래서 그 신을 모실 때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총칼 앞에서 맨몸으로 달려드는 충만한 기운, 예속을 뚫고 나와 저항하는 폭발적 힘, 갑오년에 동학농민군이 우금티고개에서 보여주었던 그 기세는 이후로 독립운동이든, 정권교체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할 때든 가리지 않고 민중의 내부에서 폭발했다.


동학은 성리학 500년의 틀을 무너뜨렸다. 서학이 선교사를 통해 다가왔고 프랑스의 압력 속에서 이 땅에 자리를 잡아갔다면, 동학은 저 스스로 500년 성리학을 검토하며 새로운 논리를 찾아냈다. 그것은 조선 초기 정도전이 나라의 이념으로 성리학을 내세웠던 것과 비교할 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동학은 혁명적으로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해 보지 않은 이념을 내걸고 수평적 민주주의와 시스템 개혁, 그리고 모두가 두루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제시했다.      


다시 최제우로 돌아가 보자. 최제우는 경주 용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최옥에게 배웠다. 최옥은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퇴계 학통을 잇는 유학자로서 과거제도 혁신을 논한 「파과거사의(罷科擧私議)」, 토지제도의 개혁을 논한 「한민전사의(限民田私議)」, 과부의 개가를 허락하라는 「허개가사의(許改嫁私議)」 등 혁신적 저술을 했다. 그는 용담을 무릉도원으로 생각하며 살았고, 뒤늦게 낳은 아들을 열심히 가르쳤는데, 아무리 아들이 재가녀의 자식이라서 벼슬길에 나서지 못할지라도 사람 구실을 하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제우는 아버지를 통해 주자학적 교양과 퇴계와 남명에 대해 배웠고, 민본사상을 익혔다. 아버지 최옥은 성과 경을 지키는 것이 자기 일의 전부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지켜야만 도에 이르고 사람들의 전범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을 받아들인 최제우는 「좌잠(座箴)」에서 “성경신(誠敬信) 석 자로 힘써 공부해 이치를 꿰뚫으면 비로소 앎(知)에 이르게 된다”고 말했다. 


최제우는 문(文)만 중시한 것이 아니라 무(武)도 중시했다. 최진립이라는 무반(武班)의 후손인 그는 신체를 단련해야 정신이 제대로 깃들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남명의 칼(경의검)이 최제우의 용천검(「검가」)으로 바뀐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기개는 마을을 지키는 일(鄕保)에서 나라를 바로잡는 일(輔國安民)로 나아갔다. 최제우는 20년 가까이 산천을 주유하면서 영남 유학의 지역성에서 벗어나 서학을 체험하고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태평천국의 난을 지켜보면서 ‘다시 개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영남 주리론의 전통을 전복시켜 리(理)의 자리에 ‘지기(至氣)’를 올려놓음으로써, 누구나 하늘을 모셨다(侍天主)는 꿈의 세상을 도모했다. 최제우가 좌도혹민(左道惑民)이라는 죄명으로 41세에 처형당했으나, 그가 세운 ‘동학(東學)’은 30년 후에 호남에서 시작해 전국 방방곡곡을 펄펄 끓어오르게 했다.


암울한 시대에 최제우의 복음은 지하에서 되살아났고, 최시형과 전봉준에 의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최제우와 최시형, 그리고 전봉준은 1%의 가능성을 믿고 세상을 뒤집겠다고 나섰다. 자기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언제라도 붙잡히면 죽을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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