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사 수업 중 진도는 삼국시대, 선생님께서 질문하셨다.
“충청도 사람이 왜 느리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까?”
한강을 두고 영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고구려, 백제, 신라였다. 현재의 충청도 부근 지역민들은 자고 일어나면 나라가 바뀌는 탓에 늘 혼란스러웠다. 그러다보니 무장한 군사를 만나면 상대가 먼저 말을 걸길 기다렸다가 고구려 말을 쓰면 그제야 ‘나는 고구려인이오’했다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숨기고, 상대에 맞춰야 생존할 수 있다는 처세술이 500년 넘도록 지역의 습성으로 남은 것이라는 일종의 ‘썰’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당장 설득됐다. 무엇보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기도 했다. 해서 여러 상황에 자주 언급했다. 한 역사서의 서평에도 인용했고, 충청도라는 지역을 이야기 할 때도, 무거운 대화의 화제를 돌릴 때도 유머 포인트로 써 먹는다.
국경이나 지역의 경계에서 분쟁이 잦은 것은 사실이다. 반면 무역이 성행해 문화나 산업이 융성해진다는 것을 역사 곳곳에서 알 수 있다. 경계의 불안 섞인 긴장감은 변화에 빠른 대응과 삶에 대한 투지를 불태우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경계의 역동성이라고 할까.
境界 :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 지역이 구분되는 한계
警戒 : 뜻밖의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여 단속함, 옳지 않은 일이나 잘못된 일들을 하지 않도록 타일러서 주의하게 함
그 경계를 개인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나는 여자, 40대, 프리랜서다. 상반되지만 동시에 가지는 역할도 있다. 운전자이지만 보행자이기도 하고, 엄마이지만 딸이기도 하다. 독자이지만 글을 쓰기도 하고, 소비자이지만 생산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숙명은 살고 있지만 반드시 한 번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그렇게 수많은 경계에 서 있다.
즉, 입장이라는 것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게 된다는 것. 표면적으로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양면을 자연스럽게 오간다. (때로는 오간다는 체감을 전혀 하지 않기도 한다.) 경계가 편 가르기와 다툼, 차별까지 유발하게 되는데도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자꾸 경계를 확인하고 멈칫, 생각에 잠기게 된다. 예를 들어 『완득이』(김려령, 2008)이는 평범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이다. 허나 완득이의 경계를 잘 들여다보면 장애를 가진 아버지와 베트남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웃사이더가 된다. 그의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완득이에 감정을 이입하다가도, 막상 내 주변에 그런 아이를 만나게 되면 대개 경계한다는 모순을 느낄 수 있다. 경계가 분명해질수록 절망감에 휩싸이고, 모호해질수록 불편함은 커진다. 동명의 영화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적극적 사고의 개입을 하는 것과 시각과 청각에 의존한 수동적 개입은 양쪽 모두 간접 경험이라도 깊이가 다르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 삼킬 것인가』에서는 책 VS 유튜브,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는 자연 VS 건축, 『뉴턴의 아틀리에』는 과학 VS 예술이라는 구도가 보인다. 작가는 그 경계에 서서 자신의 가치를 세워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유의미한 질문을 던진다. 대립은 서로 아예 척을 지기도, 때론 화해하기도 하면서 독자들만의 경계에서 판단할 여지를 남겨두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 분명한 고독과 마주한다.
읽기라는 행위가 두 가지 역량, 고독해질 수 있는 역량과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고 생각해요. (유튜브는 책을 집어 삼킬 것인가 p.91)
그런가 하면 글쓰기는 경계에 선 적나라한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다. 철학의 삼화과정이라고 할까. 절망하고 분노한, 위태롭고 가여운 자신을 직시하기란 불편함을 넘어서 불쾌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 글 쓰는 환경을 찾아갔다. 최근 나의 글쓰기는 대부분 책을 읽고 감상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단순한 독서록에 그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라는 필터를 거친 책의 기록은 나만의 무늬가 반드시 생길 것이라는 게 서평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이유다. 그렇게 ‘수필과 서평 사이’라는 타이틀이 탄생했다.
작가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면서도 내가 가진 추억을 불러오거나, 가치관을 더하는 일은 새로운 창작에 가까웠다. 쓰는 일이 정말 쉽지 않았다. 특히 앞서 언급한 대로 민낯의 나를 마주할 때의 괴로움을 견디기 힘겨웠다. 그저 독서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쓰는 서평이었지만 (그 누구도 꼭 써야 한다고 강요한 적이 없지만) 약 3,000자 분량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최소 3일에서 7일 정도였다. 한 편의 서평을 쓸 때마다 적어도 스무 번은 퇴고했다. 쓰면서 고치고, 읽어보고 고치고, 소리 내 읽고 고치고, 출력해서 보면서 또 고쳤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다. (멀고도 가까운 p.100)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정교하게 칼을 갈 듯이 나를 몰아세우는 일이다. 하지만 날을 세워 누군가에게 겨누기 위한 게 아니다. 그 칼끝은 스스로를 향해 있다. 그래서 읽을수록 어렵고, 쓸수록 괴롭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말한다.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그런데 경계에 서보니 알겠다. 인간의 다양함을, 그래서 다름은 당연한 것임을, 그럼에도 세상이 부조리함을. 그러니 통찰하는 비판과 마음의 평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위태롭게 생사의 경계에 선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함께 해야 할 순간에 힘을 보태고, 불합리와 부정에 맞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경계에서 경계하는 일임을 이제 멈출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