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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달 april moon Mar 30. 2020

공간의 경계境界에서 반인문학을 경계警戒하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승효상 | 컬처그라퍼



시간은 아름드움을 빚어내는 거장의 손길 
하늘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시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시키듯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빛나는 얼굴이 살아난다 

- 박노해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건축을 공부했다. 그 일로 벌어먹고 살지 않아봐서 그야말로 공부했다는 게 전부다. 유명한 건축가도, 건축 양식도 거의 다 잊어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건축을 미학적으로 보려는 약간의 노력뿐이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이름 하나는 ‘승효상’이다. 학부시절 전공을 배우기도 전에 처음으로 답사라는 명목으로 찾았던 건축물이 동숭동 문화공간(현 대학로 TOM)이라는 승효상 건축가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가장 먼저 공부한 건축가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가 내세운 ‘빈자의 미학’에 크게 공감했고, 그가 설계한 수졸당(유홍준 교수의 집)이나 수백당 같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것마저 잊었다. 


첫째 아이를 낳고 한참 못 만났던 친구를 홍대입구 부근의 서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건축 관련 서적을 손에서 놓은 지 7-8년은 됐을 시점인데 그날따라 건축 책들이 꽂힌 책장을 서성였다. 단번에 눈에 띤 이름과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는 제목을 눈으로 쓸어내리며 낮게 탄식했다. 책을 펼쳐 보니 우리나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 베스트3에 꼽는 부석사, 소쇄원, 선암사가 전부 등장했다. 계산대로 직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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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차용한 박노해 시인의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라는 서시부터 빠져들었다. 그리고 「진실은 현장에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 번 내가 승효상에게 끌릴 수밖에 없음을 절감했다. 건축을 굳이 어떤 장르에 넣어야 한다면 미학도, 공학도 아닌 <인문학>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건축설계라는 일이 남의 삶을 조직해주는 것인 만큼, 건축가가 좋은 집을 설계하고 짓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집에 사는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가져야 하고, 이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지극한 관심의 토대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바른 건축 공부란 우리 삶의 형식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 (14쪽)


작가는 삶의 실제를 확인하기 위해 건축가에 꼭 필요한 것이 여행이라 말한다. 하지만 어디 건축가뿐이랴. 공간에 대한 조예를 실제 거주하는 사람이 만들 수도 있잖은가. 작가가 건축을 인문학으로 분류한 맥락에서, 여행은 우리 모두에게 교양필수과목으로 권장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승효상의 건축여행>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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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충분히 음미하며 읽은 후, 뜻은 다르지만 음절이 같은 한 단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경계>. 


먼저 작가는 공간을 통해 다양한 <경계境界>를 바라본다. 독락당에서는 고독과 고립의 차이를, (지금은 없어졌지만) 유가사 가는 길에서는 직선의 편리와 보이지 않는 길의 감동을, 소쇄원에서는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아우르는 우리나라 정원의 균형감을 통찰한다. 


다른 면에서 작가는 개발의 폭력을 <경계警戒>한다. 코르도바의 골목길에서 일상의 신비로움을 목격하고, 폼페이와 테오티후아칸과 같은 폐허에서 겸손을 배우며, 관광객이 없는 제주의 곳곳에서 풍경을 성찰한다. 선암사가 사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의미한 건축물인 이유가 조계종과 태고종의 재산분규 때문이라는 아이러니는 또 어떻고. 


대한민국 건축의 경계를 세운 김수근과 세계적 명성을 얻었음에도 자신의 경계를 허문 르 꼬르뷔지에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예술로서의 건축이 가지는 멋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마침내 일흔을 바라보는 건축의 대부가 안내한 인문학 여행을 마치고 나면 한없이 겸허해진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공간에 남겨진 묵직한 잔향이 선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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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참 개발과 성장에 목을 매고 있던 대한민국(건축)을 향해, 비움과 절제라는 비수를 꽂은 40대의 젊은 건축가는 30년 동안 ‘빈자의 미학’이라는 철학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수졸당, 웰콤시티, 제주 추사관, 노무현 대통령 묘역, 하양 무학로 교회, 조계종 전통불교 문화원 등 전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건축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자신의 건축을 담은 첫 책, 『빈자의 미학』(1996)부터 『건축, 사유의 기호』(2004),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2012)와 최근 동숭학당의 수도원 여행기를 담은 『묵상』(2019)까지. 책을 통해서도 꾸준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승효상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공간을 비우는 엔지니어이자 성찰하는 예술가이며 질문을 던지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오래오래 건축 설계를 하고, 책을 내주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와 같은 책 속의 공간들을 실제로 순례하는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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