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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치너머 Jan 24. 2021

어떤 당연함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 노사 합의', 그 너머의 이야기

 1월 21일 새벽, 정부의 중재로 택배 노동자(택배기사) 과로사 문제 해결을 위한 택배업계 노사합의가 이루어졌다. 지난 1월 8일, 임시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중대재해처벌법과 함께 택배업 등을 법령상으로 처음 규정한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이하 생물법)」이 제정된 지 13일 만이었다. 생각보다 엄청 화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번 합의가 암울함 속에서도 정치의 마지막 가능성을 확인한 중요한 계기로 보고 있다. 이번 합의에서 주목하여야 할 사항은 아래와 같이 크게 네 가지다.

1. 분류작업의 택배 사업자 책임을 처음으로 명시하였다. 내가 주문한 재화가 택배를 통해 쇼핑몰로부터 우리 집에 오기까지는 크게 네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택배업체가 쇼핑몰로부터 처음 재화를 인수하는 ‘집화’ 작업을 시작으로 해당 재화가 허브터미널 → 서브터미널 → 지역 영업점 → 우리 집까지 도달하기까지 끊임없이 ‘분류’와 ‘상·하차’, ‘배송’ 작업이 반복된다. 수능 끝난 고3들이 알바로 한 번씩 다녀와서는 하나 같이 혀를 내두르는 그 ‘상·하차’가 이 ‘상·하차’ 맞다. 모든 작업이 고되겠지만, 특히 서브터미널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지역별 ‘분류’ 작업은 택배 노동자가 밤새 꼬박해도 부족할 정도로 업무 강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껏 택배 노동자들은 배송을 위한 부수 작업이라는 논리만으로 온 새벽을 갈아 넣어야만 하는 그 ‘분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생략’ 당해왔다. 택배업계의 역사와 줄곧 함께해왔던 이 불합리가 이제야 비로소 개선된 것이다.

1-1. 박홍근 의원이 지난 10월 생물법 제정안을 처음 낼 때까지만 해도 ‘분류’와 ‘배송’의 분리 원칙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오명을 썼었지만, 다행히도 약 세 달여 만에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정치적 합의를 통해 분류작업의 책임이 택배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택배 사업자에 있으며, 불가피하게 택배 노동자가 분류작업을 수행해야 할 경우, 적정임금을 택배 사업자가 지급하여야 함을 명시했기에, 이전처럼 공짜노동을 강요당하는 상황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코로나 사태에도 끊이지 않던 택배 노동자 과로사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적받아왔던 만큼 꼭 실질적인 개선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2. 택배기사의 작업시간을 1일 최대 12시간, 1주 최대 60시간으로 제한하였다. 특히 불가피한 사유를 제외하고는 9시 이후 심야 배송을 제한하는 원칙이 세워진 건 주목할 만하다. 최근 쿠팡의 ‘로켓배송’, 마켓컬리의 ‘샛별배송’ 등 밤낮을 불문한 배송 속도전이 업체들의 주요한 마케팅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악순환에 경종을 울릴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다. 참고로 택배기사들은 전원이 독립사업자로서 계약을 맺는 특수고용직이므로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번 합의로 제한된 작업시간마저도 사실 일반 노동자의 평균과 비교할 때 여전히 과다한 것도 사실이다.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고, 이에 정부가 합의를 통해 연구하겠다고 나섰으니 환영할 일이다.

3. 택배 분류작업 명확화, 택배기사의 작업 범위, 적정 작업조건 및 불공정거래행위 금지 등을 반영한 표준계약서를 올해 상반기까지 마련하기로 했다. 택배 노동자들이 지금껏 공짜노동을 강요받았음에도 문제 제기 한 번 못했던 이유가 바로 계약서의 표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택배 사업자가 택배 노동자와의 계약서에 작업 범위 등을 규정하지 않고 방임해왔기에, 택배 노동자로서는 본인 소관 지역의 물류를 배송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규정되지도 않은 분류작업 등을 공짜로 해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 합의를 통해서 비로소 택배 노동의 범위와 가치가 정의된 것이다.

4. 마지막으로 택배비 거래구조 개선에 합의했다. 쉽게 얘기하면 택배 노동의 가치에 적정한 택배비(배송비) 재산정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물가는 매년 상승했지만, 택배비 평균단가는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12년 이후 매년 하락했다. 2020년 기준으로 택배업체가 한 건당 받는 택배비는 2,221원이다. 온라인 주문 때마다 2,000~3,000원가량의 배송비만이 붙어왔음을 고려하면 택배업계의 열약한 실정은 사실 예견되었던 것일 수 있다. 그 2,000원 정도의 택배비마저도 택배 업체 간 경쟁이 심화되며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중 일부를 다시 회수해가는 리베이트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도 한다. 그렇기에, 택배 노동의 가치를 현실화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과제일 수 있다.

 택배 노동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비로소 그 가치가 재평가되기 시작한 대표적인 업종이다. 만시지탄일지라도, 이번 합의는 분명한 진일보이고 함께 이뤄낸 정치의 결실이다. 이들의 노동에 정당한 사회적 가치가 매겨질 수 있도록 모두가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하고 양보하는 것이 남은 과제일 것이다. 나에게 당연하기만 했던 것이 사실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희생도 당연시될 수는 없으며, 그 모든 정당한 희생에 합당한 가치를 보장할 수 있는 사회가 이제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를 기꺼이 가능케 할 더 많은 정치의 가능성과 결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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