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수

by 김제숙



맞수



“놀고 있어.”

철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영희에게 이 한마디를 툭 뱉고는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매일 듣는 말이지만 영희는 오늘따라 남편의 그 말에 심기가 몹시 불편하였다.

‘놀고 있으라니’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출근을 하면서 남편 철수가 하는 말이라곤 으레 ‘놀고 있어’ 그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말이 고깝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영희는 그 이유가 삼십 대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나이 탓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전, 영희는 제법 규모가 탄탄한 출판사의 편집부에서 근무를 했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하려던 계획도 있었다.

철수와 시끌벅적하게 연애를 하고 미래의 설계도에 철수를 끼워 넣으면서 그 계획은 뒤로 밀렸다. 결혼을 하여 사내아이 둘을 연년생으로 낳아 기르면서 영희의 생활은 따로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동창모임에도 겨우 일 년에 한두 번정도 얼굴을 디밀 뿐이었고 취미로 열심이었던 사진도, 테니스도 다 지나간 어느 순간의 삽화처럼 시들해져 버렸다.

영희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집안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손길이 일일이 닿아야 하는 남편과 두 아이를 보면서 너무나 감격하여 혼자 눈물을 찔끔거린 적도 있었다.

여학교 교사인 철수는 언제 보아도 단정하고 품위가 있었다. 균형 잡힌 체격이어서 양복이 잘 어울렸고, 영희는 그런 철수를 위해 넥타이를 고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와이셔츠를 다림질 하곤 했다. 두 아들도 준수한 외모는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에 두 녀석을 데리고 동네 산책이라도 나가면 보는 사람들마다 한 마디씩 덕담을 하곤 했다. 영희는 내심 그것을 즐겼다. 온 세상이 다 그녀의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온 세상’이 어느 때부턴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소리 없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국화빵 틀에서 찍어내는 국화빵처럼 매일매일의 생활이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문을 온통 열어젖힌 채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집 앞 카페에서 매일 모이는 아이들 친구 엄마들이랑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잡담을 하다가 혼자 먹는 점심이라 대충 때우고, 아이들 간식을 만들고 나면 막내가 돌아오고, 시간을 맞춰 학원을 챙겨 보내고, 저녁 반찬은 뭘로 할까, 남편이 좋아하는 조기매운탕으로 말까, 아니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오징어 볶음으로 할까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창 밖에는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영희는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더 이상 마이더스의 손이 아닌 것이 서글펐다. 그전에는 그녀의 손이 닿으면 모든 것이 빛이 났었다.

예감도 없이 눈물이 났다. ‘나는 정말 놀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시간의 흐름 위에 나를 방치해 둔 것일까?’

영희는 남편이 무심코 던지고 간 말에 하염없이 매달렸다.

네 시 알람이 울렸다. 곧 돌아올 아이들을 위해 간식을 만들 시간이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영희는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대구에 사는 친구였다. 영희의 목소리가 침울하게 가라앉은 것을 눈치 챘는지 친구가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무슨 일이야?”

“은수야, 나 권태기인가 봐.”

전화기 속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 아직도 그러니?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나 권태기인가 봐’ 하는 거?”

“내가 그랬었니?”

전화기 저 너머의 소식은 친구의 부음이었다. 변호사와 결혼을 하면서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더니 갑자기 동창들과 거리를 두어서 한동안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친구였다. 심장마비라고 했다. 나이 마흔을 바로 코앞에 둔 세월 위에 서고 보니, 20년 저 너머의 꿈 많던 단발머리 여학생의 모습은 빛바랜 앨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삶의 적나라한 무늬는 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남편과 사별한 친구, 이혼을 한 친구, 아직까지 독신인 친구, 그리고 벌써 이 세상에 없는 친구도 여럿이었다.

“내일이 장례식인데 올 거니?”

친구가 물었다.

“못 가. 얘들 땜에.”

“흥, 그러구서도 권태기라구? 알았어. 넌 별로 친하지도 않았잖아.”

영희는 전화를 끊고 나서 우선 커튼을 걷고 창문부터 열었다. 이제 하루 동안의 방황을 끝낼 셈이었다.

‘흥, 김철수! 나보고 놀고 있으라구? 그런다고 이 이영희가 지구를 떠날 것 같니?’

영희는 종종걸음으로 청소기를 돌리고 아이들의 간식으로 여러 가지 야채를 넣어 볶음밥을 만들었다. 장을 보지 않고 저녁상을 보기 위해 냉장고 안의 잡다한 찬거리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철수는 종갓집 장손이었다. 사실 영희는 지금껏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함께 외출을 할 때도 시어머니는 으레 다섯 발자국쯤 뒤쳐져 가시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아들이 아니랄까봐 철수도 아내에게 살가운 인사치레를 하는 것은 큰일이 나는 줄 아는 사람이니 그야말로 ‘놀고 있어’는 철수로서는 나름의 다정한 인사였다. 그렇지만 철수의 말 저변에는 주부들의 가사 노동을 우습게 보는 저의가 다분히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영희로서는 어떻게든 대응을 해야 했다.

이튿날 아침, 철수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놀고 있어"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영희도 이때를 놓칠세라 철수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당신도 놀다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