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도장을 찍는 백만 가지 이유 중 하나

by 김제숙

이혼 도장을 찍는 백만 가지 이유 중 하나



영희는 마침내 철수가 내민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일 년이나 끌어오던 것이었는데 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달랑 딸 하나 있는데 부모가 돼서 앞길에 재 뿌릴 일 있어? 결혼 전까지 절대 안돼. 만나는 사람있으니 오래 안 걸려. 그때까지 참아."
영희는 철수에게 이 말을 던지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입장을 고수해오던 터였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손톱도 안들어가던 얘가 갑자기 엎은 이유는?'
캠퍼스 커플이었던 그들 부부의 시끌벅쩍한 연애사를 알고 있는 친구들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해가 제일 안되는 사람은 철수였다. 그렇게 빌고, 어르고, 사정하고, 협박을 해도 영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희의 자존심을 짓밟는 말도 서슴없이 해댔다. 치사한 짓을 했다고 철수는 생각을 했다. 영희의 말대로 얼마를 더 못기다릴 것도 없었다.


더 늦기전에 같이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 인생에서 행운일까?, 불행일까?
철수는 한 번 바꿔 살아보고 싶었다. 이 나이에 가슴 뛰는 사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다. 더구나 상대는 나 아니면 안된다고 하지 않는가? 오래 살아온 마누라는 어디 갖다놔도 잘 살 사람이다.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액자 속 풍경 같다. 철수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을만큼 숨이 막혔다. 머릿 속이 완전 컴퓨터의 하드웨어 같은 여자였다. 젊은 시절엔 그게 좋아보였다. 집안 대소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살아가면서 처리해야 하는 일, 자질구레하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영희가 맡아서 했다. 철수는 그저 소설만 써내면 되었다.
영희는 남편이 바람이 나서 삼십 년 결혼 생활을 쪽내게 생겼는데 이상하게 억울하거나 분하지가 않았다. 다만 딸아이 결혼때까지는 그림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철수의 상대가 좋게 말하면 시크하고 나쁘게 말하면 왕싸가지여서 철수랑 워낙 휘젓고 다니는 통에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영희의 친구도, 철수의 친구도 분기탱천하여 철수를 성토했지만 영희는 의외로 담담하였다. 친구들이 찾아오거나 전화로 난리 칠 때도 '으흥...그랬대.', '그랬구나', ''그래서?' 등등의 반응으로 일관해서 친구들의 혈압을 올리는데 기여했다는 후문이었다.
영희도 자신의 마음 상태가 의아하였다. 분이 끓어오르지 않는 거였다. 마음이 떠났다는데 어쩔거야? 착착 감기는 여자랑 살아보겠다는데 어떻게 말려? 아니 왜 말려야 하는데?
결혼생활 하는 중에 철수가 종종 말했다. 너무 감정이 없다고. 매사 질서정연한 게 숨막히다고.
철수가 이렇게 몰아세울 때마다 영희는 별일이다 싶었다. 그게 좋다며? 오르가즘은 저리가라할 정도로 미치게 한다며? 좋아하는 책이 <수학의 정석>이라고 했을 때 오줌쌀 뻔 했다며?


수학을 전공한 영희는 정말 그랬다. 답이 두 개가 있을 수 없는, 푸는 방법은 달라도 답이 하나로 똑 떨어지는 학문이 좋았다. 그래서 소설 쓰는, 정답도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내느라 고심하는 철수가 좋았는지도 몰랐다. 영희가 보기에는 철수가 별천지에 사는 사람 같았다. 무명 작가여서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영희가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으니 못 먹고 못 입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철수에게 별로 큰 불만은 없었다. 다만 거짓말을 꾸며내어 이리저리 끼워 맞추느라 고생이 많구나 싶었다.
간섭하지 않고 그냥 두었더니 문단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제법 잘 팔리는 작가의 대열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그냥 그렇게 쭈욱 가는 인생은 너무 재미가 없는 것일까? 그래서 신은 군데군데 복병을 숨겨놓았을까?
서류상으로도 깨끗하게 남남으로 돌아서고 나서 철수가 정말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미안해."
"괜찮아. 정말이야."
영희가 정말 괜찮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철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럼, 뭔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나 해서. 더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철수가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영희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깜빡 잊고 갑자기 웃음 터트렸다.
그저께 영희는 철수의 상대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메일 주소를 어떻게 알았을까 잠시 의아했지만 곧 알아차렸다. 얼마 전, 영희는 <생활 속 재미 있는 숫자 이야기>라는 책을 한 권 냈었다. 책 날개에 메일 주소를 넣어뒀으니 주소 알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듯 싶었다.
그녀로서는 완전히 끝내지 않은 철수와 영희의 관계가 불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희에게 메일을 보낸 것이리라.
어차피 당신 자리에 들어갈 터이니 당신 얼른 비켜라, 이런 뜻의 글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글을 읽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댓 줄 글인데 맞춤법이 엉망이었다. 철수씨를 맣이 사랑한다, 맣이 기다렸다, 맣은 상처를 주어서 미안하다, 미레를 사랑하는 사람과 계척해 나가고 싶다, 이런 투였다.
왜 그랬는지 그 오자투성이의 메일을 읽는 순간 빨리 도장을 찍고 싶어졌다. 그리고 오늘 도장을 찍었다
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