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스샘 Jul 15. 2024

50대, 돈버는 일의 가치

프롤로그, 호모 라보란스

직장 다닐 땐 날으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로 일을 했다. 년년생을 키우며 어떻게 일을 하냐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난 늘 일터에 있었다. 셋째를 뱃속에서 보내고도 3일이 지나지 않아 일터로 나갔다. 일만이 나의 가치를 증명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직사각형 명함에 내 이름 석자를 올리는 것에 우쭐해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의 명함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더 있어야 할 수만가지 이유보다 나가라는 한 마디 통보가 더 강했다. 그렇게 내보내진 이들을 못본 것도 아닌데 내 일이 되니 마치 쇼를 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매일 아침 가야할 곳이 없어지면서 평생 안 떨어질 것 같았던 이름 뒤 직함도 같이 실종됐다. 덜컥 걱정이되었다. 앞으로 나를 아는 이들은 나를 무엇이라 불러야할 지 난감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이름뒤 직함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찾질 않았다. 아니, 내가 더 이상 직함으로 만나던 이들과 단절했다. 이 엄청난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가사일은 서툴렀다. 열심히 해도 티가 나질 않았다. 나는 수많은 가사노동의 전설적 존재들의 흔적을 쫓아가느라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 제대로 된 한 뼘의 땅도 허락하지 않았다. 늘 서툴렀고 무엇보다 아무도 내가 애써 한 그 일의 가치를 존중해주지않았다. 무엇보다 나름 집안 일에 재미를 붙여보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도 그 노력에 상응하는 댓가, 바로 돈을 주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기가 난 나는 가사노동에 대해서도 정부가 돈을 줘야한다고 설파하고 다녔다. 


퇴직 후 몇 달도 안돼어 나는 어마어마한 소비형 인간으로 전락해있었다. 나의 움직임엔 항상 돈이 들었다. 돈을 버느라 쓸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해봤지만 돈을 쓰느라 벌 시간이 없다는 것은 처음 느꼈다. 매일 바빴다.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는 공허함을 메우려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러 다녔다. 매일 새로운 재료가 들어간 음식으로 가족을 불러모았다. 나는 인생 최대의 소비를 하고 있었다. 


일할 때보다 더 빼곡한 일정을 만들어 직함이 없어진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던 나는 결국 허무에 빠지고 말았다. 혼자서 멍때리고 있을 때면 일하던 내가 그리웠다. 일을 하고 싶어졌다. 매일 돈을 쓰며 하는 일이 아닌 돈을 벌어주는 일을. 


드디어 세상을 향해 나를 던졌다. 아무거나 해보자고. 이젠 어느 누구도 과거의 직함에 맞는 일을 내게 주지 않는 것을 직시해야한다고. 하지만 일의 결과는 냉정했다. 시원한 카페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먹을 것을 꾹 참으면 될 정도의 돈을 받을 땐 돈버는 일에 대한 내 생각이 심하게 흔들렸다. 내면의 차가운 멘토는 차라리 소비를 줄여라며 수시로 나를 조롱했다. 하지만 난 계속 일을 할거다. 그것도 돈버는 일을. 


자아가 부서지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그 어떤 일의 현장에서 나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