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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샘 Jul 18. 2024

옛사랑의 유효기간

서랍 속에서 뭔가가 손끝에 닿았다. 5년 전 유럽 출장을 다녀온 남편이 사 온 머리끈이었다. 유럽까지 가서 명품가방이나 사 오지 무슨 머리끈이라며 화냈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서랍 안에서 견딘 세월에도 검정 벨벳은 질감과 색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간 여름 어느 즈음에 눈에 띄기도 했지만 소재가 갖는 느낌 때문에 착용을 미뤘었던 것이 기억났다.


조의에 어울리는 끈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끈은 지수의 검은 생머리를 단정하게 돌려 감아 긴 머리를 안정감 있게 묶어주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번졌다. 셀카를 찍어 점심식사를 하러 갈 남편에게 카톡 문자를 보냈다. 지수의 남편은 늘 같은 이모티콘을 보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이돌이 두 손을 치켜올려 ‘최고예요’를 날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길 가로 몰려나왔다. 창문 밖은 눈이 제법 내리고 있었다. 점심을 같이하자는 J과장의 청을 거절하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거리를 투벅투벅 걸었다. 타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분주하게 걸었다.


 가게에서 베어 나오는 냄새들이 그들의 주린 배를 더 자극한다는 표정들이었다. 그제야 지수도 아침을 커피 한잔으로 때운 것이 생각났다. 길가 군고구마 통에서 냄새가 피어올랐다. 허기가 올라왔다. 길거리에서 음식 먹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나이였다.


그 나이에 버금가는 뻔뻔함이 지수에겐 평생 큰 자산이었다. 그런데 왠지 지금은 위 속으로 뭔가를 넣는 것이 이적행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 대한.


하늘에 날리는 눈송이 송이 사이로 검은 띠가 드리운 그의 사진이 함께 힘없이 흩날렸다.


오래전 어느 겨울날에 함께 팔짱을 끼고 이 길을 걸었을 듯한 첫사랑의 부고를 받았다.


지수는 기계적으로 오전 업무를 처리하고 손에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옅은 눈발이 내리는 정동길로 쫓기듯이 나왔다.


부고에 담긴 사진이 함께 따라왔다. 아니 지수를 앞서갔다. 하늘을 봐도, 땅을 보아도 어느 한 모퉁이에 아이가 날리는 연처럼 앞서 흩날렸다.  


진눈깨비가 눈동자에 내려 차갑게 스며들자 눈을 감았다.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에 맞는 뭔가를 생각하려고 애썼다. 의식은 애써 뭔가를 꺼내려고 하는데 무의식이 단단히 막고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고인에 대한 추모의 예로 무언가를 기억해보려 하는 지수에게 지난 20년의 시간은 잔인했다. 그와 언제 이 길을 걸었는지 걸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그때 무슨 말을 나눴는지 애써 떠올려보는 것이 저지당하고 있었다. 그저 눈동자에 닿은 눈의 차가움처럼 그런 느낌과 추측만이 떠올랐다.


 지수는 생각했다. 그 이유가 시간이 오래되어서라기 보다 통합된 자신의 가치관으로 인해 이제는 이미 의미를 논할 때가 지나버린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 예의 삼아 갖는 조의가 우스꽝스러워진 거라고. 그래서 새삼 뭔가를 느껴보려고 떠올린 기억들이 자신의 경험인지 어느 드라마 속에 본 내용인지 헷갈리는 게 당연한 거라고


지수의 기억만큼이나 내리는 눈발은 갈 길을 잃고 금세 지쳐버렸다. 사위가 조용해졌다. 밥과 커피를 찾아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이들도 사라졌다.


그렇게 걷기를 멈춘 채 모든 이들이 사라진 정동교회 앞에서 얼마를 더 서 있었다. 교회의 작은 쪽문이 열렸다. 조용하면서도 정갈한 나무 향기가 새어 나왔다. 점심시간이 이미 훌쩍 지난 터라 교회 안은 고요했다.


 지수는 조용히 가장 뒷자리 구석에 앉았다. 눈동자 가득하게 눈물이 고여왔다. 조용한 교회 예배당은 지수 같은 이들이 몰래 와서 흘린 눈물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혀 반응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지수의 눈물샘이 생물학적 반응을 일으키고 그래서 지수도 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범용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마주 잡고 있는 손등에 눈물이 닿았다. 뱃속 저 깊은 곳에서 길러온 냄새가 났다.


 기억 저편에서 아직도 살아있는 누군가의 부고가 함께 떠올랐다. 지수는 지금 조문을 하고 있었다. 이승을 떠난 옛사랑에게, 옛사람에게, 기억을 소환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없는 누군가에게. 조문을 했다.


교회의 시계가 두 시를 알렸다. J과장이 문자를 보냈다.

‘부장님, 회의 시간 다 돼갑니다.’ 지수는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반동에 머리끈이 바닥에 떨어졌다. 허리를 구부려 머리끈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내내 손끝에서 머리끈이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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