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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기억의 향기

by 그레이스샘

“기억은 향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잊었다고 생각한 순간, 어느 틈에서든 피어난다.”


문을 열자마자 후각이 먼저 반응했다.
낡은 나무, 말린 허브, 그 위에 얹힌 바닐라 같은 향기.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발을 들였다.

그 순간, 뒤에서 문이 ‘철컥’ 하고 닫혔다.
이상하게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마치 여기는 원래부터 내가 있어야 할 곳처럼 느껴졌다.


전당포 내부는 넓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질문이 생겼다.
벽 가득 매달린 오래된 시계들.
모두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은 멈춘 것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안쪽, 곡선으로 휘어진 통로를 따라가자
조용히 숨 쉬는 듯한 방이 나왔다.
그리고 그 방 한복판엔 투명한 진열장이 길게 뻗어 있었고,
그 안에는 형형색색의 기억 블록들이 떠 있었다.

작은 정육면체.
투명한 겉면 안에서 빛이 흐르고 있었다.
파란색, 분홍색, 주황색…
어떤 것은 깊고, 어떤 것은 옅었다.
마치 감정의 온도처럼.


“색이 예쁘죠?”

낮고, 묘하게 잔향이 남는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있었다.


리안.

차분한 얼굴.
은빛 눈동자.
피부는 창백했지만, 눈빛만은 기묘하게 따뜻했다.
검은 셔츠 위에 낡은 베이지빛 코트를 걸쳤고,
왼쪽 손목엔 시간이 멈춘 시계를 차고 있었다.

“기억은 살아 있는 감정입니다.”
그가 진열장 너머의 블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색이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변하죠.”


나는 물었다.
“…그리고 그걸 맡길 수 있어요? 여기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저당잡는 대신, 당신은 무엇이든 얻게 됩니다.
시간, 기회, 돈, 재능, 혹은… 새로운 삶.”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다.
그저 나는 그 말을 ‘믿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나는 기억전당포의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선택은 이미 끝난 것 같았다.


며칠 후, 전당포에 첫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구겨진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정리되지 않았고, 눈 밑엔 밤새 사라지지 않은 고통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사진 한 장.
빛바랜 종이 속에는, 웃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한 명.

“그 기억을 맡기고 싶어요.”

그는 낮게 말했다.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말끝엔 미세하게 갈라지는 감정이 스며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리안은 사진을 받아 들었다.

그가 한 손을 뻗자, 눈앞에 새하얀 블록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속으로 사진이 스르르 스며들었다.

순간, 빛이 일었다.
블록 속에서 붉은색과 연한 분홍빛이 섞이며 일렁였다.

“색이… 예쁘네요.”
내가 말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아이를 잊고 싶어했으니까요.”
리안이 대답했다.

잠시 후, 블록은 서늘한 주황색으로 변했다.
희망과 슬픔이 공존하는 색이었다.


“원하는 대가는요?”
내가 물었다.

그는 멈춰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이요.
그 아이가 떠난 시간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만큼의 시간.”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시계는 그 순간 ‘멈췄다’.

그가 나가고 난 뒤, 리안은 장부를 꺼내 조용히 적었다.


[지훈 – 기억 반환 기한: 미정 / 회수 조건: 사랑의 이름을 웃으며 부를 수 있을 때]


나는 무심코 진열장의 블록 하나를 바라봤다.
희미하게 빛나는 연보랏빛.
이유도 없이 끌렸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리안이 말했다.

“그건, 아직 당신이 꺼내지 않아야 할 기억입니다.”

그날 밤, 전당포 안에 남은 향기가
내게 어떤 이름도, 어떤 표정도 아닌
익숙한 ‘감정’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지독하게 낯선데, 어쩐지... 그리운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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