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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생일케이크

by 그레이스샘 Mar 31. 2025

                                                                                                                                                                                                                                                                                                                                                                                                                                                  기억은 지워진다 해도, 감정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언젠가 다시,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수시로 진눈개비가 벚꽃처럼 흩날리는 늦겨울이었다. 거리엔 아직 봄이 올 기미가 없는데도 베이커리카페 진열대 위에 놓여진 생크림을 가득 담은 케이크 위 딸기들은 유난히 색이 붉었다.


이른 아침, 기억전당포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진한 회색 코트깃으로 얼굴의 반이상을 가린 여성이 들어왔다. 짙은 검은 색의 긴 머리는 무심한 듯 하나로 묶여있었고 저절로 빠져나온 잔머리가 창백한 이마와 볼을 덮고 있었다. 피부가 하애서인지 다크서클은 짙은 아이쉐도우을 그린 듯 눈 아래 음영을 만들어주었고 옅은 립그로스를 살짝 바른 입술은 매마른 기를 숨기지 못했다. 연한 분홍 색 매니큐어로 단정한 손톱은 아찔할만큼 짧게 깍여있었다. 찬 냉기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음걸이에서는 옅은 단호함이 묻어났지만 코트 안 어깨는 한없이 안으로 말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나의 형식적인 인삿말에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리는 사람마냥 얼굴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상대방을 긴장시키는 눈이었다. 너무 맑아보여 좀 더 자세히 쳐다보고 싶어지는 눈을 힘없이 뜬 채로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 기억을 맡긴다는 말… 진짜인가요?"

질문을 하며 낡은 손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그 노트 안에는 오래된 생일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카드 안쪽엔 색이 바랜 채 희미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의 마지막 생일.  딸기생크림케이크. 그리고… ‘그 말’.

마치 미리 준비해왔다는 듯 그 카드를 내쪽으로 밀었다.

신청카드에 서유진 33세라고 적던 그녀는 애써 무심해지려고 다짐하는 듯 방문이유를 사무적인 말투로 던졌다.

"그날을 지우고 싶어요. 그날, 그 말을 듣고 난 후로, 전… 누구한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용히 덧붙였다.            .

"엄마는 그날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딸기케이크? 이걸 선물이라고 샀니? 니 엄마 암환자인거 몰라?  너는 한다는 짓마다 왜 늘 나를 힘들게 하니.'"


그녀는 그날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느껴지는 지 미간을 심하게 찌뿌린채 눈을 감았다.


"그 한마디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어요. 몇 년이 지났는데도요. 부모님은 제 생일에 늘 딸기생크림케이크를 주문해줬어요. 항암으로 인해 매일이 고통스럽지만 생일만큼은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고싶었어요. 그게 그렇게 화를 낼 일이었는지...... 사랑받고 싶어서 준비한 건데, 오히려 미움받은 느낌이었어요."


그 날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 그녀는 고개를 숙인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그날로 저는 집을 나왔어요.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심해지는 엄마의 히스테리를 더 이상 받아주고 싶지 않았어요. 이후 엄마를 찾지 않았죠. 그런데 엄마가 죽었어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엄마가 어디있어요. 나를 끝까지 미워한거예요. 엄마의 부고를 들은 이후론 더 잠을 못자고 있어요. 왜 내가 이렇게 죄책감에 힘들어해야하죠? 다 잊어버리고 싶어요. 기억을 맡아주세요. 그 기억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 때, 찾으러 올께요"

속사포처럼 사연을 토해낸 유진은 기억을 맡긴 댓가로 무엇을 주겠냐고 물었다.


"무엇을 원하세요?"

"내가 못찾은 하지만 꼭 찾아야 하는 이야기를 주세요"


리안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에서 카드를 받아 들었고, 순간, 기억 블록 하나가 떠올랐다.

처음엔 밝은 딸기색, 곧이어 짙은 갈색이 번졌다. 그 안에서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 그리고 싸한 바람 같은 감촉이 스쳐갔다. 그리고 블록의 중심이 살짝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건 ‘소멸 직전의 기억’이 흔히 보이는 형태였다.


"기억은 너무 오래 감춰두면 부식됩니다. 감정의 핵이 깨져 버릴 수도 있어요." 리안이 설명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래도… 맡길게요." 유진은 속삭였다. "그날의 제 모습이… 싫으니까요."


블록은 진열장 안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색은 멈췄지만, 그 안의 감정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며칠 후, 나는 점심에 먹을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러 근처 베이커피카페에 들렀다. 붉은 딸기를 수북히 쌓아올린 생크림케이크가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선 노부인이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올해도 같은 케이크 드릴까요?"

"그래요. 우리 딸은 딸기를 참 좋아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매년 이맘때, 이 케이크를 사게 돼요. 이상하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열장 안에 금이 간 블록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렴풋이— 내게도 누군가 딸기 케이크를 사다준 기억이 있는 것 같았다. 이름 없는 장면, 냄새, 감정. 기억이 아니라, 감정의 기시감.


그날 밤, 나는 진열장 앞에 섰다. 유진의 블록은 여전히 금이 간 채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중심에, 아주 작은 연한 빛이 생겨났다. 희미한 살구빛.

그건 ‘감정의 회복’이 시작된 색이었다.

리안은 블록을 꺼냈다. 그 속에서 살구빛은 더욱 퍼졌고, 금이 가 있던 중심은 스르르 봉합되듯 사라졌다. 감정은 회복되고, 기억은 ‘새롭게 받아들여질 준비’를 마친 것이다.


일주일 뒤, 유진이 돌아왔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잠시 주저하는 듯했지만, 곧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사를 가려고 묵은 짐을 정리했어요. 엄마의 짐도. 정리를 하다 우연히 엄마의 메모장을 발견했어요. 엄마가 병원 입원할 무렵에 썼던 것 같아요. 그 안에… 이런 글이 있었어요."

그녀는 카드와 함께 조심스럽게 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는 오래돼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랬지만, 글씨는 의외로 또렷했다. 그건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모였다.


'유진아, 그날 말은… 정말 미안했어. 엄마가 아파서, 너와 더이상 이 빨간 딸기를 함께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 겁이났어. 나는 파리하게 죽어가는데 유난하게 붉은 그 딸기가 나를 조롱하는것 같더라. 내가 무너지고 있었던거야.  그래서 말이 험하게 나왔어. 진심이 아니었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딸기케이크 정말 고마웠어. 엄마가 그간 받아온 생일케이크 중 제일 맛있더라.'


딸에게 가슴아픈 말을 남겼지만 그녀의 엄마는 딸이 사온 딸기생크림케이크를 애써 먹었던 것이다.


"엄마는… 날 미워하지 않았어요." 유진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있었지만, 목소리는 분명했다.

"그날의 그 말이 엄마의 진심이 아니었단 걸… 이제야 알게 됐어요."

"그날을 웃으며 기억할 수 있어서… 이젠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요."


모진 말을 하는 엄마에게 차가운 인사를 남기고 떠났고 이후 그녀의 엄마는 병원에서 치료 중 죽었다. 화해의 말 한마디를 못하고 떠난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공황장애를 앓았다. 유진은 엄마보다 그렇게 떠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그녀를 죽은 엄마의 기억이 다시 빛으로 인도했다.


유진은 나를 바라보며 수줍게 웃었다. 그녀의 표정은 처음 이곳을 찾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의 내면에는 이미 따뜻한 봄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전당포 안으로 달달한 딸기생크림케이크 같은 봄 바람이 밀려왔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조용히 노트를 펴고 내 이름 아래 작은 메모를 남겼다.

[하은 – 기시감 반응: 딸기 케이크 / 감정 연동: 따뜻함 + 불안정함]


리안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흔적을 남겨요. 당신의 것도 예외는 아니에요."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은,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니라— 다르게, 새롭게 해석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2화 끝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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