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이 이혜림 Jun 15. 2022

그래, 가자! 까짓 거, 산티아고!

걷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게 된 이유 

결혼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불현듯 그동안 머나먼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세계여행을 지금 떠나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다녀온다면 한국에 돌아와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좋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남편에게 세계여행을 떠나자고 말을 꺼냈을 때, 

그는 내 제안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두 번째로 꺼냈을 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고, 세 번째로 꺼냈을 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흐르고 생각 정리가 끝났다는 남편은 함께 세계여행을 떠나보자고 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데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디인지 묻자, 남편은 설레는 표정으로 답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처음 듣는 곳이었다. 찾아 보니 산티아고 성당과 그곳을 향해 걷는 순례의 의미는 차치하고 내 눈에 순례길은 여기저기가 아프고 물집이 터져도 계속 걷는, 흡사 800km짜리 극기훈련같아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순례길을 가자는 남편의 제안만은 반드시 거절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세상에서 걷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체력도 정신력도 약하고, 땀을 흘리거나 몸이 힘든 건 모두 꺼려해서 평소 하는 운동이라고는 숨쉬기가 전부였다. 그런 내가 고행의 길이라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순전히 내 의지로 가겠다는 생각을 할 리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순전히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세계여행을 가고 싶다는 내 꿈을 위해 안정적인 직장도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남편. 그런 남편의 인생 버킷 리스트로 꼭 가고 싶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는 차마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다.


걷는 것, 힘든 것, 땀 흘리는 것을 모두 감수하겠다는 결심을 할 만큼, 

나는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내가 가야 할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남편이 가고 싶어하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남편을 위해 걷는 길. 

800km쯤이야 하루 20km씩 걸으면 40일이면 끝나니까, 40일 딱 참고 걸어보지 뭐.

하루 20km씩도 안 걸어본 여자가 결국 이렇게 외치게 됐다.


"그래, 가자! 까짓 거, 산티아고!" 


몇 번이고 울음을 터트리며 걸어갔던 나의 찌질한 순례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