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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n 18. 2022

Day1. 사실 난 걷는 게 싫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첫날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낡은 나무바닥, 방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아주 오래되고 낡은 침대. 이정도면 삭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절했던 매트리스. 그 위에 올려진 아주 얇은 일회용 시트 한 장. 왠지 벌레가 기어다닐 것만 같은 침대에 누워 나는 밤새 잠을 설쳤다. 매트리스가 너무 더러워 보여서 그 위에 침낭을 깔고 그 안에 들어가서 잤는데, 자는 내내 침낭 밖으로 머리카락 한 올도 빠져 나가지 않도록 애쓰느라 도무지 편히 잠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꿈일 거야. 현실이 아니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꿈이길 바랐다. 너무나도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내 눈앞에 있었다. 분명 숙소 예약사이트에서 높은 평점과 후기를 보고 꼼꼼히 고른 숙소였다. 이게 평점 높은 최고의 숙소라면, 앞으로 순례길에서 머물러야 하는 숙소들은 얼마나 더 최악이라는거야? 심지어 침대에서 인터넷 와이파이조차 연결되지 않는다. 와이파이는 숙소 건물 1층에 있는 거실 소파에서만 터진다. 유심도 사오지 않은 우리 부부의 핸드폰은 그저 화질 안 좋은 카메라에 불과했고, 덕분에 어젯밤에는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아주 일직 잠자리에 들었던 참이다. 






더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새벽녘에 눈을 떴다. 어느덧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계속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남편 역시 잠을 설친 것 같다.


"여보, 침대가 너무 소리 나고 찝찝해서 잠 제대로 못 잤지?"

"아니, 나는 오늘부터 걸을 생각에 설레서 못 잤는데? 침대는 괜찮았어."


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남편과 나의 온도차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소풍을 앞두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을 한 남편을 보고 있으면 여기 오길 잘했다 싶으면서도, 지저분하고 힘든 걸 못 참는 나를 생각하면 앞으로가 막막해진다.


산속 깊은 마을이라 그런지 하룻밤 새 부쩍 서늘해진 새벽 공기에 침낭 속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오래도록 밍기적거렸다. 한껏 여유를 부리다 일어났는데 어제 저녁 만실이라던 숙소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내가 제일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 떨고 있는 줄 알았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동이 틀 무렵부터 길을 떠났다고 한다.


한껏 들뜬 남편은 방 안에서 순례길 시작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고 한다. 남편이 이렇게 인증사진에 의욕을 보이는 사람인 줄 몰랐다. 덕분에 세계여행 출발하던 날 공항에서도 찍지 않았던 인증사진을 순례길 여정을 앞두고 찍게 되었다. 길을 떠나기 전, 의자를 두 개 놓고 남편과 나란히 앉아 아주 어설프게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숙소 앞에 있는 빵집에서 사온 빵과 커피에 바나나를 곁들여 소박한 아침도 먹었다. 빠트린 건 없는지 꼼꼼히 배낭을 챙기고, 숙소를 나와 천천히 길을 걸었다. 남편과 나의 순례길, 그 첫 시작이었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어제의 경험대로 조개껍데기를 매단 배낭을 메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까미노의 이정표인 노란 화살표가 보였고, 화살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길게 뻗은 오르막길이 나왔다. 꽤 많은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걸었지만, 무척 조용했따. 쥐 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가 경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을을 빠져 나와 숲으로 들어서자, 순식간에 시공간이 바뀐 것처럼 고요했던 세상이 새소리로 가득 찼다. '새소리에 행복해졌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 순간에도 나는 걷기가 싫었다. 난 정말이지 걷는 게 너무 싫다.


익숙하지 않은 배낭을 메고, 무거운 등산과를 신고 산을 오르는 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겨웠다. 와, 이렇게 힘든 건 줄 알았으면 난 안 왔지! 여기 왜 왔지, 난 왜 여기 있는 거지. 무거운 카메라를 목에 걸고서 두 걸음 걷고 사진을 찍고, 세 걸음 걷고 사진을 찍으며 좀처럼 설렘을 숨기지 못하는 남편 뒤에서 이곳에 오기를 선택했던 나 자신을 자책했다. 한껏 인상을 찡그리고 발끝만 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배낭의 무게에 어깨와 골반이 짓눌리며 저려왔다. 아픔을 줄이려면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걷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마을에서부터 함께 출발했던 눈에 익은 순례자들은 어느새 저만치 앞서갔다. 자꾸만 뒤처진다는 생각에 조급해지고, 의기소침해졌다. 이 길은 나 같은 애들은 올 곳이 못 되는 것 같다. 힘들어서 더는 못 걷겠다.


"우리 쉬었다 가면 안될까?"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 쉬는 시간을 갖는지 모르겠다.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서서, 앞서 가는 남편을 불렀다. 혼자 신이 나서 가볍게 깡총깡총 걸어가는 남편이 내심 얄미웠고, 생각보다 훨씬 더 못 걷는 내가 야속했다. 너무 힘들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남편은 자꾸만 저기 보라며, 너무 멋지지 않냐며 호들갑을 떤다. 괜히 뾰로통해져서 남편이 말을 걸 때마다 퉁명스러운 대꾸가 나왔다.


"헤이, 다 괜찮은 거지?"


인상을 팍 구기고 앉아 쉬고 있는 내게 누군가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한 명뿐이 아니라 지나가는 모든 순례자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심지어 순례길 관리 직원은 차에서 내려 내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지 달려와 확인했다(내가 너무 지나치게 자주 쉬는 모습을 보여,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여겼나 보다).





이렇게 생전 모르는 사람들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괜찮으냐고 물어올 때마다 구겨졌던 마음이 살살 펴졌다. "나 괜찮아. 힘들어서 잠시 쉬고 있을 뿐이야."라고 억지로라도 활짝 웃으며 대답했는데, 웃다 보니 이상하게 기분도 슬슬 좋아지기 시작한다.


신기한 길, 그리고 신기한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부엔 까미노!"라는 말을 건넸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따. '부엔 까미노'는 스페인어로 '좋은 순례길이 되길!'이라는 뜻이다. 인사 대신 서로의 순례길에 염원을 빌어준다니, 너무 근사하다. 그들의 "부엔 까미노"에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땡큐"로 답하던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부엔 까미노!"를 건네기 싲가했다. 마법 같은 언어였다. 서로에게 건네는 이 말을 시작으로, 생전 모르던 사이에 '순례자'라는 연결고리가 생긴다. 이 길 위에서는 왜 모두 친구가 된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부엔 까미노'라는 말을 주고 받다 보면, 걷기 싫어 뾰족하게 날을 세웠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곤 했다. 


걸음이 느린 탓에 남편을 비롯한 모두가 나를 앞질러 가고, 어느새 길 위에 혼자 남아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정적이 느껴졌다. 마른 나뭇잎이 가득 쌓인 흙길을 걸었다. 타닥타닥 하는 내 발자국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허리를 곧게 펴고 서서 숲 내음을 한 모금 깊게 마셔보았다. 서울에서는 마셔보지 못한, 몸속 구석구석까지 깨끗해지는 듯한 아주 차갑고 청량한 공기였다. 한참을 혼자 바위산ㅇ르 오르고 나서야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산 중턱에 도착했다.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 위로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두 팔 벌려 눈을 감고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역시! 난 네가 걸을 수 있을 줄 알았어."


땀에 젖은 남편이 내 앞으로 달려와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런 남편을 향해 눈을 흘겼다.


"내가 뭐랬어! 순례길은 나한테 무리일 거라고 말했잖아. 힘들어 죽겠어."


갑작스레 태세를 전환하기가 멋쩍어 괜히 투덜거렸으나 실은 이 길이 아주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까지 혼자 걸어왔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이건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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