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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n 22. 2022

황홀했던 첫날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조차도 유일하게 알고 있던 사실이 있다. 

바로 내가 오늘 걷게 될 피레네 산맥이 순레길의 전체 여정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면서도 가장 넘기 어려운 고통의 길이라는 것. 이틀에 걸쳐 나눠 걸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피레네 산맥에 숙소가 있나 알아보았다. 


딱 하나 있었다. 오리손 산장. 

이 산맥의 유일한 순례자 숙소라고 했다. 3개월 전에 예약해도 자리가 없다는 오리손 산장인데, 운 좋게 하루 전에 예약할 수 있었다. 스페인어에 능통했던 관리소의 프랑스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한번에 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순레길에서의 첫날을 여유롭게 마칠 수 있었다. 






오리손 산장은 생각보다 아담했고,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이 산장의 가장 큰 특징은 샤워를 '5분 컷'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체크인을 하면 순례자에게 토큰을 하나씩 나눠 주는데, 샤워 직전에 토큰을 넣고 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면 정확하게 5분 뒤에 물이 끊긴다. 이게 뭐라고, 여러 번 경험이 있다는 다른 순례자에게 5분 이내로 샤워하는 비법까지 전수받았다.


"머리가 제일 중요해. 일단 물을 틀기 전에 샴푸를 짜서 머리에 바르고 시작해."

"물을 틀면서 바로 머리를 벅벅 감아! 그리고 그 거품들로 몸을 재빠르게 헹궈내야 해."


한 번도 5분 내에 샤워를 해본 적이 없어서 조금 긴장하며 씻었는데 되려 시간이 조금 남아서 여유롭게 손가락 발가락 사이까지 씻을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심지어 뽀드득뽀드득해지도록 잘 씻어 매우 만족스러웠다. 5분은 터무니없이 적다고 생각했는데, 평소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오래도록 샤워하던 나의 습관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5분은 샤워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배정받은 침대에서 오들오들 떨며 낮잠을 자다가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 한껏 웅크린 몸으로 식당에 갔다.

식당 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공기가 느껴질 정도로 식당 안은 이미 오늘 산장에서 함께 머무는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당연하게 모든 순례자가 합석할 수밖에 없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모두 삼삼오오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쉬이 녹아들지 못하고 우리 부부는 사람들에게서 살짝 떨어져 앉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나는 이런 북적거리는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매번 이렇게 소란스러운 가운데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식사를 해야 하는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 가득 안고 있는데 음식이 나왔다. 변변치 않은 것으로 점심을 때우고서 오늘 처음 제대로 된 식사다, 수저 가득 수프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따뜻한 수프가 목구멍을 넘어 쪼그라든 위장으로 들어가니 바짝 긴장했던 마음도 이내 사르르 풀린다.


우리 부부가 앉은 테이블에는 이탈리아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순례자가 합석했다. 식사를 하며 눈인사를 주고받으니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과 조용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들 옆에는 스페인과 남미에서 온 순례자가 앉아있었고, 뜨거운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라 그런지 모두가 유쾌했다.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과 수다가 오가며 어느덧 어색했던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훈훈하게 무르익었다.


그 때,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오리손 산장의 직원이었다.


"지금부터 우리 오리손 산장의 전통이자, 저녁 식사의 하이라이트 시간을 소개할게요.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서로 영감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에서 왔고, 이름은 무엇이고, 이곳에는 왜 왔는지에 대해 차례로 말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 갑자기 난감해졌다. 나는 영어를 그다지 잘 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걱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완벽한 문장과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모두들 어설픈 실력으로나마 영어로 자기소개를 이어갔다. 서로의 언어가 달라도, 영어 실력이 부족해도, 표현이 좀 서툴러도 모두 괜찮았다. 이곳은 까미노니까.


단어로, 몸짓으로, 얼굴 표정으로 어떻게든 그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천천히 다 들어주는 사람들. 굳이 이곳에 왜 왔는지 말하지 않더라도 그저 모든 게 다 통하고 있는 듯했다. 그 속에 나와 남편이 있었다. 지금 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순례길을 걷기 위해 한 날 한 시에 이곳에 모여 있었다.



*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혼자 걷는 사람 

*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잃어버린 것 같아 왔다는 사람 

* 아들로 태어났지만 딸이 되고 싶어 하는 자녀와 함께 걷기 위해 온 사람.

(그녀는 담담하게 I came here with my daughter 라고 말했다.)


* 작년에 일을 너무 많이 하느라 쉬지 못해 휴식을 찾아 온 사람 

* 은퇴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위해 온 사람 

* 12살 아들과 온 아빠 


* 일생 일대의 소원이라며 홀로 떠나온 50대의 가장

* 베스트 프렌드와 함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온 사람 

* 모험을 즐기기 위해 온 사람 

* 과거에 걸었던 까미노를 잊지 못해서 다시 찾아온 사람 




세계 곳곳에서 아주 다양한 이유로 이곳에 온 모두의 이야기가 하나의 큰 울림이 되어 다가왔다. 그들과 잠깐이지만 하나가 된 기분.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져 울지 않기 위해 오히려 더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이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벅찬 감정이었다. 어느덧 내 차례가 왔다.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는 까미노 순례가 남편의 꿈이기 때문이야. 나는 사실 걷는 것을 아주 싫어하지만, 좋은 아내가 되고 싶어서 함께 왔어. 모두 부엔 까미노!" 


누구보다 짧은 문장으로 전한 소개. 이런 대단치 않은 이유도 그들에게 작은 울림이 되었나 보다. 소개하는 그 순간에는 식당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어버렸지만, 너의 진심이 너무 좋았다며 꼬옥 끌어안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따스한 손길에 이상하게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행복했다. 정말이지, 숲속의 작은 집에서의 마법처럼 황홀한 첫날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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