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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l 09. 2022

Day3. 이상한 해방감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준비하고 걷기 시작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무겁고 아파서 한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이 생활을 한 달정도 더 해야 한다니, 맙소사! 눈앞에 깜감해졌다.


매일 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며 매일 그 짐을 등에 메고 20km씩 걷다보면 적응되는 날이 올까?

아니면 아침마다 점점 더 몸이 무거워질까. 이 길의 끝에 나는 과연 멀쩡히 살아는 있을까.



"어제 잘 때 누가 나 밟았나 봐. 몸을 못 움직이겠어. 당신은?"

"난 괜찮아. 할 만한데?"



벌써 길을 떠날 채비를 마친 남편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서서 2층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는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순례길 시작할 적에 남편이 내 가방에 있는 짐의 절반을 본인 가방으로 덜어갔으니, 분명 힘들어도 훨씬 더 힘들 텐데. 이상하게 남편의 얼굴에는 늘 함박 웃음이 걸려 있다. 그 모습이 기특하기는커녕, 저 혼자만 행복하게 길을 걷는 남편이 부럽고 얄미워 죽겠다. 


갑자기 날이 흐려지면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일기 예보는 종일 맑음이라고 했는데! 마음이 조급해진다. 게다가 아직 오늘 머물기로 한 마을까지 절반도 채 걷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어서 그 다음 마을까지 수 킬로미터를 더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급한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혜림, 정민! 여기 좀 봐요."


고개를 드니 길 왼편으로 자그마한 언덕이 있었고, 언덕 위 아주 큰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손을 흔들고 있는 미국에서 온 순례자 커플이 보였다. 첫날 스톨모트를 하며 안면을 텄는데, 그 뒤로 보이지 않아 내심 잘 걷고 있는지 궁금했던 친구들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와인을 병째로 들고 마시며 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커지는 내게 부부는 쉿! 하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눈짓을 주었다. 그들이 앉아있는 나무 아래로 펼쳐진 너른 잔디밭에는 엄마 소와 아기 소들이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개의치 않고 평온한 표정으로 풀을 뜯고 있었다.



"혜림, 다시 만나 너무 반가워요. 그런데 여기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게 꿈만 같아요."


그랬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귀여운 소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비가 더 쏟아지기 전에 다음 마을에 빨리 도착할 생각만 했던 내 마음 속으로 갑작스럽게 평화가 비집고 들어왔다.  서둘러 걷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놓칠 뻔 했따. 사실 중요한 건 빨리 도착하는 게 아닐 텐데 말이다. 


와인을 마저 비우고 뒤따라 걷겠다는 미국인 부부와 헤어지고, 다시 우리 부부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우가 쏟아졌다. 재빠르게 우비를 입었는데도 비가 얼마나 많이 솓아지는지 홀딱 다 젖었다. 귀찮고 번거로울 법한 그 순간에 이상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비를 맞을까 걱정했던 긴장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그 순간, 무척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연두색 얇은 우비를 입은 머리와 어깨 위로 굵은 빗방울이 투툭투둑 떨어졌다. 빗방울이 몸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와 느낌은 나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끌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물웅덩이를 찾아다니며 앞뒤 따지지 않고 그대로 뛰어들어 온몸에 물을 튀기며 놀곤 했었다. 그때 내게 비는 '걱정'이 아니라 '재미'였다. 모처럼 나는 어릴 때처럼 아무 걱정 없이,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으로 비를 맞았다. 이렇게 비에 홀딱 젖어보는 것도, 우산이 아닌 몸으로 비를 맞아보는것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수비리 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알베르게의 체크인 시간을 한참 지난 뒤였다. 운 좋게도 마지막 남은 침대 두 자리를 차지했다. 평균 5시간이면 다 걷는다는 코스를 우리 부부는 무려 9시간에 걸쳐 걸었다. 굉장히 늦은 체크인을 하는 우리에게 한 순례자가 다가와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도착했어요?"



요 며칠 한국인 순례자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었다(그만큼 나는 걸음이 정말 느리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게으르고 부지런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져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좀 천천히 걸었어요. 아기 소, 엄마 소도 구경하고요."



순례길을 걷는 데에는 정답도, 정석도 없으니 내가 걷고 싶은대로 걸으면 그만이다. 

오늘 밤 내게 이런 느긋한 마음을 알려준 미국인 부부는 이 곳 수비리 마을에서 무사히 머물고 있을까. 

그들은 오늘 숲에서 와인 한 병을 다 비우는 대가로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그 또한 하나의 순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룻밤 머물렀던 알베르게 숙소. 주로 남편은 일층에서, 나는 이층에서 잔다. 




점점 더 걷는 게 힘겨워져 매일 아침 눈도 발도 퉁퉁 붓는다.



그에 반해, 신기하리만큼 늘 기분이 좋고 컨디션이 최상인 남편 




오늘도 걷는 걸 싫어하는 아내와 걷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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