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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l 12. 2022

Day4. 걷는 것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스페인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오늘의 걸음을 시작했다. 오전 7시가 조금 안 된 시각, 길 위엔 아무도 없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려는 듯 들려오고, 해가 떠오르는데 밤새 떠 있던 달도 여전히 환하게 우리를 비춰준다. 별이 콕콕 박힌 검고 푸른 하늘 아래 갈대는 흩날리고, 그 갈대를 헤치며 걷는 길 위에는 오직 우리 둘 뿐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이렇게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비현실적인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그 순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순례길은 늘 예상보다 지체되곤 하는 것이다. 


오늘도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날씨를 염두에두고 꽤 이른 시간에 출발했지만 걸음이 느린 탓에 도중에 결국 비를 만났다. 능숙하게 우비를 착용하고 빗속을 걸었다. 처음 비를 만났을 땐 조바심이 나서 서둘렀지만, 이제는 비가 와도 평소의 속도를 유지하며 걷는다. 서두른다고 몸에 힘을 주고 걸었다가는 다음 날 걷기 힘들 정도로 몸에 무리가 온다는 걸 직접 경험하며 배웠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다가 폭우가 쏟아지려던 찰나, 마침 간이 쉼터가 나와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쉼터에서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 모녀를 만났다. 일곱 살 여자아이와 아이의 엄마였는데, 주말이나 아이의 방학에 맞춰 조금씩 쪼개어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쉼터 구석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가방에서 절인 올리브와 바게트를 꺼내 간단한 식사를 했다. 비오는 숲속의 풍경을 감상하며, 쉼터의 지붕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이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있었다. 여유와 우아함이 엿보이는 태도였다. 아, 멋지다. 발을 동동 구르며 비가 언제 그칠지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주어진 상황 자체를 즐기는 모습. 그들의 느긋한 여유를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가 그치고 다시 길을 걸으면서, 다른 이들은 이 순례길을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 눈여겨 보게 되었다. 어떤 이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그림ㅇ르 그리고 있었고, 어떤 이는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팜플로나 마을 초입에 다다랐을 때, 오리손 산장에서 안면을 익힌 순례자 릴리와 앤서니를 마주쳤다. 내가 알고 있는 순례길의 방향, 그러니까 노란 화살표 표식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그들에게 길을 알려주려고 큰 소리로 불렀다. 


"릴리! 팜플로나는 이쪽으로 가야해요."

"하하, 알아요. 저기 건물 1층에 펍이 보여서 맥주나 한 잔 하고 가려고요."


남편과 나는 동시에 머리를 망치로 탕! 하고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 당연하게 노란 화살표만 따라서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우리 부부는 이제껏 모범생처럼 '국민 루트'라 일컬어지는 순례길 루트를 따라 걸어왔다. 한번도 노란 화살표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생장 순례자 사무소에서 나눠준 순례길 안내문에 써있는 추천 마을의 추천 알베르게에서 머물렀다. 우리에게는 늘 오늘 머물 알베르게의 주소와 예상 도착시간이 있었다(늘 그 예상 시간을 한참 지나 도착하긴 하지만). 계획이 없으면 불안한 나는 이 길 위에서도 여전히 머릿속으로 계획을 짰고, 그 계획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따. 오후가 되도록 계획했던 것보다 절반도 못 걸었을 땐 마음이 조급해지곤 했다. 중간에 아무리 예쁜 풍경이 나타나도, 한번쯤 들어가보고 싶은 카페가 보여도 꾹 참고 걸음을 재촉했다.


돌이켜보니 순례길을 걷는 '과정'은 뒤로하고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원하는 순례의 여정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즐겁지가 않았다. 남편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쉬고 싶다. 길바닥에서 잠깐 쉬는 거 말고, 릴리처럼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 마시며 쉬고 싶어."

"나도. 지금 차가운 맥주 한 잔 마시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

"마실까? 늦게 도착하면 뭐 어때. 설마 우리 두 사람 잘 알베르게 하나 없겠어?"


어제 오후 미국인 순례자 부부를 만나고, 오늘 릴리를 만난 이후로 우리의 순례길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해질 무렵에 카페에 들어섰다. 오후에는 늘 알베르게에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기 위해 분주했는데, 그 마음을 조금 내려놓기로 한 것이다. 걷는 것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혹시 머물려던 알베르게가 꽉 차서 머물 수 없다면 다른 알베르게를 찾으면 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우리가 행복한 방식으로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커피를, 남편은 맥주를 한 잔 주문하고서 너른 잔디밭이 펼쳐진 야외 테라스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카페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팝송을 흥얼거리며 나른한 햇살을 쬐고 있는 이 순간이 참 여유로웠다. 


내가 언제 또 이렇게 온전히 걷는 것에만 집중하는 단순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면 더없이 소중해지는 시간이다. 비가 와서 호들갑을 떨었고, 바람이 많이 불어 넘어질 것 같았고, 덕분에 발에 힘주고 걷느라 발바닥이 불날 것 같았지만 모두 괜찮았따. 먹구름이 걷히고 해가 반짝 뜬 순간, 카페 테라스에서 말간 하늘을 보며 마신 오후의 커피 한 잔이 하루의 고단함을 모두 날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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