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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l 13. 2022

Day5.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혜림, 정민! 나도 같이 걸어도 될까?"

"그럼! 당연하지!"


마을을 빠져 나오는 길목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른 건 나디아다. 마눌라와 순례길 동행처럼 걸으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나디아. 짧은 휴가를 받아 순례길을 잠시 걷던 마눌라는 오늘 아침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매일 서로에게 의지하며 걷다가 마눌라를 먼저 보내고 이제 다시 혼자 걸으려니 늘 생기 넘치던 나디아도 오늘은 기운이 안 나는 모양이다. 같이 걷자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길 위에서 남편 외에 처음으로 새로운 동행이 생겼는데,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좋아하는 나디아라서 기뻤다. 나디아는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로, 첫날 오리손 산장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친해진 친구다. 그녀는 수십 가지의 생동감 넘치는 얼굴 표정을 가지고 있고, 목소리는 활기차며, 성격은 다정하고 유쾌하다. 그래서인지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늘 기분이 좋아진다. 걷는 데 지쳐서 남편과 나 사이에 형용할 수 없는 무거운 기운이 감돌 때도 어디선가 나디아가 나타나면 우리의 분위기도 한껏 밝아지곤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길 위에서 마주칠 때마다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나를 꽉 끌어안아주고는 양쪽 볼에 비쥬를 해주는 나디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색체가 한 톤 더 밝아지는 듯한 매력을 가진 나디아를 우리 부부는 안 좋아할 수가 없다.


그렇게 늘 햇살같이 빛나던 나디아가 오늘은 어쩐지 많이 시무룩해 보인다. 마눌라가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나디아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어제 마눌라와 저녁 식사는 잘 했어? 내 작별 인사도 잘 전해주었고?" 마눌라를 떠올린 나디아는 애써 웃어 보였지만 금세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벌써부터 마눌라가 보고 싶다고 했다.


이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내게 꼭 묻는 질문이 있다. "너는 까미노에 왜 왔어?"라는 질문. 사실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남편이 오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대하는 얼굴로 답을 기다리는 순례자에게 늘 싱거운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도리어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왜 왔는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사람들은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이리 고생하며 길을 걷는지 알고 싶었다. 얼마 전, 한적한 숲길에서 만난 나디아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디아는 까미노에 왜 왔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냥 남편이 오고 싶다고 해서 온 거잖아."

"나도 잘 모르겠어. 악덕 사장 밑에서 일하면서 몇 년 만에 한 달짜리 휴가를 얻었는데, 그때 이 길이 생각났다. 가야겠따고 생각했어. 까미노가 나를 이끌었어."



"Camino called me." 나디아는 그렇게 말했다. 까미노가 나를 이끌었다고. 단지 그 뿐이라고. 내게도 애써 의미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분명 너에게도 역시 까미노의 부름이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라고.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걸으면 된다고.


며칠 전 나를 위로해주던 나디아가 지금 내 앞에서 울고 있다. 먼저 떠나버린 마눌라가 그립고 보고 싶다며 마음 내키는 대로 울고 있었다. 나디아의 눈물은 너무 맑고 투명해서 그녀의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다 알아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딱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순례길에서 함께하는 시간은 일상에서 맺는 관계보다 곱절 빠르고 깊게 이어진다. 그저 함께 걷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우연히 오리손 산장에서 인연처럼 만나 다섯 날을 함께 걸었으니, 마눌라가 떠난 빈자리가 허전할 나디아가 나는 충분히 이해됐다.





까미노가 나를 부른 게 맞는지, 불렀다면 왜 나를 부른 건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까미노가 왜 나와 나디아를 만나게 해주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있어."라는 어린 왕자 책 속의 구절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 팔에 새긴 친구, 나디아. 나는 그녀에게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웠다. 


그날 우리는 오래도록 함께 길을 걸었다. 나디아에게 '티라미수'의 본토 억양을 제대로 배웠고, 이탈리아의 1호 스타벅스는 이탈리아인보다 외국에서 온 유학생이나 관광객이 더 많이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파스타와 김밥 떡볶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한국과 이탈리아에서 꼭 다시 만나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도 했다. 


그러다 남편이 급하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중간에 잠시 나디아와 헤어졌다. 이런 지저분한(?) 일로 함께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곧 따라 걸을 테니 먼저 걸어가고 있으라고 나디아를 앞으로 보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두어 시간 이내에 나디아의 걸음을 다시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고, 오늘 밤 같은 숙소에 머물며 더 많은 마음을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디아와의 만남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는데, 내가 나디아를 얼마나 많이 좋아하는지 말해주지도 못했는데 그날 이후로 길 위에서 나디아를 만날 수 없었다. 나디아는 어차피 금방 또 만날 텐데도 늘 헤어질 때는 나를 꼬옥 안아주곤 했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그 포옹이 하루에 서너 번 이상 반복되기도 했다. 나디아와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내게 작은 위안이 되어준 것은 그간 여러 차례 나눴던 포옹이었다. 마지막일 줄 모르고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따뜻한 포옹을 해주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따. 그리고 다시 만날 때도, 다시 헤어질 때도 언제나 이 만남이 마지막인 것처럼 기뻐하고 슬퍼하는 나디아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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