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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l 16. 2022

Day14. 내게는 마지막 산티아고 순례길


요즘 산티아고 순례길은 숙소 전쟁이다. 노동절과 주말이라는 반짝 효과로 꽤 괜찮은 평점의 알베르게는 언제나 오전 중에 이미 만실. 걸음도 느린 주제에 숙소 예약도 안하고 다니는 우리 부부도 오늘만큼은 불안한 마음에 아침 식사도 건너뛴 채 평소보다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일찍부터 걸으니 기분이 상쾌하다. 순례길을 걸으며 가장 기분 좋을 때를 꼽으라면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걸을 때가 아닌, 이른 새벽 아무도 없는 조용하고 싱그러운 거리를 걷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오늘은 컨디션이 아주 가뿐하고 좋다.


한참을 쉬지 않고 걸은 우리 앞에 나타난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 푸드트럭을 만났다. 항상 숙소에서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다녔기에 푸드트럭을 이용해 본 적 없었는데, 한번쯤은 사 먹어보고 싶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주문했다. 돌체구스토 머신으로 내린 캡슐 커피 한 잔과 샌드위치 두 개를 샀다. 





간이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마주치는 순례자맏 모두 한국인이었다. 길 위에 그렇게 많다던 한국인 순례자는 왜 도통 내 눈엔 안 보이는 걸까 궁금했는데, 일찍 길을 나서니 부지런한 한국인 순례자들을 아주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남편이 아닌 한국인과 한국어로 수다를 떨 수 있어 신이 났다.



"혼자 오는 게 덜컥 겁이 나서 동행을 만들어 왔는데 오히려 동행 때문에 힘이 들어요. 차라리 혼자 올 걸 그랬어. 근데 이것도 내가 여기 와서 겪어보니 알게 된 거지. 저 언니 없었으면 여기 오지 못했을 거니까, 그걸 생각하면 참 고맙긴 해요."



동행이 아닌 한국인과 한국어로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편한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우연히 만난 한국인 아주머니 순례자가 내 손을 잡고 그간 샇아둘 수밖에 없었던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언니랑 너무 간격 멀어지면 또 찾느라 고생하니까, 먼저 갈게요. 잘 걸어요.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분주하게 걷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부디 그녀가 이곳에서 당신만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굳이 의미같은 건 없어도 되지만, 혹여 나중에 이 시간을 되돌아봤을 때 이 여정이 그냥 인간관계를 힘들어하며 걷던 기억으로 남을까 걱정이 되니까.


2주 정도 지나니 지쳐 보이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다들 각자의 고충이 있구나 싶다. 내가 베드버그로 고통스러워할 때 누군가는 닿지 않는 체력으로, 누군가는 인간관계에서, 누군가는 두고 오지 못한 한국에서의 기억들로, 누군가는 무거운 가방이나 다친 다리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각자 자기가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의 짐을 지고 가는 인생처럼, 어느 정도의 고충들을 가지고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로 힘겹게 한발 한발 떼면서 가는 게 순례길이구나 싶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그러니 고통 앞에서도 겸손하자고 생각했다. 나를 비롯해 모든 순례자가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고 조금은 가볍게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이 길을 걷고 있는 모두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은 나바레떼에서 나헤라까지 간다. 이 지역은 스페인에서도 유명한 와인 생산지라 당분간은 매일 포토밭이 광활하게 펼쳐진 길을 걷게 된다. 아직 포도나무들이 아기처럼 작아 열매를 맺진 않았지만, 과일나무를 옆에 두고 걷는다니 왠지 새롭다. 어제는 폭우를 뚫고 걸었는데 오늘은 정수리가 타 들어갈 듯한 햇빛을 감당하며 걷고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폭폭 찌는 뜨거운 날씨가 계속됐고, 이제는 발바닥 빼고 전부 다 타버릴 것만 같다. 맑은 하늘과 스페인의 넉넉한 볕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쉴 때는 무척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하는 길 위에서는 살벌한 괴물처럼 느껴진다. 온몸이 땀에 절은 채로 나헤라에 5시간 만에 도착. 우리 부부 기준으로 16km는 보통 6시간 정도는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 오늘은 조금 빨리 도착한 셈이다. 길이 평탄한 것도 한몫 했겠지만 괴물 같은 햇볕을 피해 서둘러 걸었던 게 컸다.


그 덕에 숙박할 알베르게가 오픈하기까지 두 시간이나 남았다. 우리가 1등일 줄 알았는데 영국인 순례자 부부가 맨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벤치에 앉아 미리 준비해온 바게트를 손으로 찢어 가르고 아보카도를 잘라 넣어 샌드위치를 즉석에서 만들어 먹는 여유로운 모습이 인상 깊었다. 나도 배워야지.  부부의 옆에 나란히 배낭으로 줄 세워놓고 슈퍼에 가서 초코 크루아상과 우유를 사와 바닥에 앉아 '여유롭게' 먹었다. 







내 뒤로는 오늘 쪼리를 신고 30km 걸었다는 대단한 순례자가 줄을 섰고, 그 뒤로도 대기 줄은 계속 이어졌다. 순례길 오기 전 예행연습한다며 영화 <나의 산티아고>를 봤는데, 그 영화에 수십 명의 순례자가 지친 기색으로 줄 서서 알베르게 체크인을 기다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땐 굳이 저렇게까지 기다려야 해? 다른 알베르게 찾아가면 되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내가 걸어보니 알겠다. 순례자들이 줄을 서면서까지 체크인 시간을 기다린다는 건,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숙소라는 것. 후기에서 본 이 알베르게의 청결도는 만점이었으니 분명 베드버그는 없을 것이다. 베드버그 노이로제에 걸린 내게 다른 숙소라는 차선 따위는 없다. 두어 시간을 꼬박 기다려 무사히 체크인을 했다.


가뿐하게 샤워를 하고 오후에는 남편 손을 잡고 산책에 나섰다. 나헤라는 이름만큼이나 아기자기하고 예쁜 마을이었따. 다른 마을과 다르게 활기차면서도 느긋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하루 이틀 더 머물며 구석구석 산책하고 즐기고 싶은데 아직 갈 길이 까마득하기도 하고, 몸의 컨디션도 좋은 편이라 계속 걷기로 한다. 이렇게 예쁜 마을을 만나 때마다 멈춰 쉬면서 걷는다면 순례길 완주까지 족히 6개월은 걸릴 것 같다. 오늘이 이 마을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하니 지금의 산책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남편에게 지금 걷는 이 길이 내 인생의 마지막 순례길이라 생각하며 걷는다고 말했다.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아주 소중한 기회니까 더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가며 행복하게 걷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매번 똑같아 보이는 길도, 가늠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날씨도, 두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는 알베르게 대기 줄에 서 있으면서도 모두 다 정말로 좋더라.



 

나헤라는 참 예쁜 마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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