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구불구불한 산맥 하나를 다 넘어야 하는 날, 하루 종일 비와 바람이 심상치 않다는 예보가 있어 마음이 조금 급했다. 평지는 괜찮지만 산길에서 만나는 비는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새벽부터 서둘렀음에도 결국 산을 오르는 길에 쏟아지는 비를 속수무책으로 맞았다. 비보다 더 많이 맞은 것은 엄청난 바람. 고도 1000m가 넘는 산맥의 길 12km를 넘은 뒤에 6km를 더 걸어야 하는 루트였는데 걷는 내내 '폭풍의 언덕'이 따로 없었다.
맞은편에서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와서 몸을 앞으로 굽히지 않으면 도저히 걸어나갈 수가 없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커다란 배낭을 메고 그 위에 연두색 우비를 입고서 날아갈까 봐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엉금엉금 걷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곱등이 같다며 옆에서 남편이 배를 잡고 깔깔깔 웃어댔다. 정작 본인도 못생긴 곱등이처럼 걷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여보도 지금 완전 곱등이같아."
"내가 사진으로 찍어줄게. 내 눈에만 웃긴 거 아니라니까! 이거 봐!"
사진으로 찍어가면서까지 서로의 못생기고 초췌한 모습을 놀려대느라 서둘러 걸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바람 속에서 머리칼이 헝클어져서는 껄껄껄 웃다가 눈물이 나왔다. 내친 김에 어버이날 기념으로 비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서 부모님께 보내드릴 영상 편지도 찍었다. 우리 없는 빈자리 허전하실까 잠시나마 웃으시라고 보낸 영상이었는데, 고생하는 모습이 짠하다고 하셔서 아뿔싸! 했다. 바람에 날아갈까 봐 엉덩이에 힘을 주고서 못생긴 곱등이 포즈를 하고 영상을 찍는 이 순간이 마냥 웃긴 건 정작 우리 둘 뿐이었나 보다.
그 순간 문득 내가 그리고 우리가 마음의 탄력이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 어깨를 죄여오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제대로 설 수조차 없어 허리를 구부리며 걷는 길이 그리 유쾌하기만 할 순 없다. 에전의 나라면 얼굴에 인상을 팍 쓰며 걷기 싫다고 투덜거리기 딱 좋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정말로 즐거웠고, 재밌었다. 분명 나는 강해지고 있었다.
걷다 보니 거짓말처럼 금세 비가 그쳤고, 해가 떴고, 온 세상에 반짝 빛나며 고요해졌다. 그러고는 얼마 안 있어 또다시 비가 오기를 반복했다. 비가 와도 이제는 괜찮았다. 곧 다시 비가 그치고 맑아질 거라는 걸 아니까. 숲속에서는 비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말했다.
"원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면 파도 소리처럼 들려."
그동안 까미노에서 수많은 숲속을 바람과 함께 걸어왔는데 나는 오늘에서야 파도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서야 이 길이 내게 이곳의 진짜 매력을 보여주려는 것만 같았다. 마치 드디어 순례자의 자격을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