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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l 23. 2022

Day25. 나의 초심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어느덧 순례길의 절반을 걸었다. 완주가 까마득하게 느껴져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지난 날이 무색할 만큼, 요즘은 시간이 빛의 속도로 흐르는 듯하다. 중간 정산 차, 나의 까미노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순례길 초반만 하더라도 나는 가방에 음식을 많이 챙기지 않았고(그래서 상점 하나 안 나오는 구간에선 배고파서 힘들긴 했지만), 최정예 소수 구성품만 넣은 간결한 가방을 메고 매일 단순하게 먹으며 가볍게 생활해왔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한국에서의 생활처럼 매일 또다시 내가 지닌 것들의 무게에 짓눌리며 길 위의 아름다움과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다. 내 가방이 무거워지면 결국 남편이 뭐 하나라도 더 본인이 가져가서 대신 짊어지려고 하니까, 내가 욕심을 내면 낼수록 남편으 배낭도 덩달아 무거워진다. 그래서 요즘 우리 부부는 둘 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힘겹게 걷고 있다.


처음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는 마을이나 작은 구멍가게조차도 없는 구간이 꽤 길었고, 배고픔을 참아야 하거나 음식 요금을 바가지 맞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보니 먹을 거리를 구입할 기회가 올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더 구입하고 쟁여두는 습관이 생겼다. 여분으로 챙기는 것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지금은 쟁여둔 것들이 가방의 무게에 영향을 줄 만큼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마 사나흘간 아무것도 사지 않고 가방 속에 있는 것만으로만 먹어도 충분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식당이나 작은 슈퍼 하나 없이 걷는 구간은 초반에만 몇 번 나왔을 뿐, 요즘은 굶으며 걸어본 적이 없다. 혹 앞으로 그런 구간이 나온다 하더라도 전날에 미리 조금 더 구입해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더 이상 가방 속에 음식을 쟁이지 않기로 한다. 때때로 부실하고 조금 부족한 듯 챙겨 먹는 식사 또한 기꺼이 받아들여야겠다. 매일 수십 km를 걷고 있는데 뱃살이 전혀 빠지지 않는 것만 보아도 나는 이미 충분히 잘 먹고 있다.


가진 게 많고, 내가 쥐고 있는 게 많고, 소중한 물건이 많아질수록 나의 자유는 줄어들고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분명 심혈을 기울여 간소하게 챙긴 배낭인데도 걷다 보니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들이 생긴다. 도심지에서 입겠다고 가져온 원피스가 그렇고, 간단하게 메이크업 하겠다고 챙겨온 화장품들이 그렇다. 이번 기회에 필요 없는 것들을 줄이고 비워내어 조금 더 가볍게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따. 만약 지금 내가 가진 배낭 속 물건들 중 절반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나는 순례길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세계여행도 그정도의 짐으로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아니, 한국에서의 생활도 그 정도면 된다. 가진 물건이 적을수록 생활은 더 심플해진다. 몸도 마음도, 삶을 살아가는 패턴이나 생각하는 방식도 단순해진다. 여행도 똑같다는 것을 걸어보니 알겠다. 짐이 가벼울수록 확실히 여행이 더 즐거워진다. 챙겨야 할 것, 들어야 할 것, 정리해야 할 것들이 적어지니까.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내게 필요한 물건의 양은 생각보다 정말 정말 작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욕심 내지 말자. 미래를 위해서, 나중을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물건을 소유하지 말자. 내 배낭의 짐을 최소화해서 나의 어깨와 두 팔의 자유를 더욱 가볍게 즐겨보자. 오늘 그렇게 다짐하며 길을 걸어본다. 


한 달이 채 안되게 걸어온 여정. 순례길은 나를 좀 더 단순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가지고 있던 틀을 많이 깨트리게 해주었다. 베드버그에 물려 혼쭐이 나보기도 하고, 하루 28km를 내 힘으로 걸어보기도 하면서.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내가 가진 잠재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매일 온몸으로 느끼며 감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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