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함께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여보 지금 몇 시야?"
"7시. 으악, 너무 늦었다!"
못해도 여섯 시에는 출발하자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호텔의 효과 좋은 암막 커튼 덕분에 해 뜨는 줄도 모르고 아주 꿀잠 잤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피로는 제대로 풀었지만.
사흘 만에 다시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양손에는 스틱을 들었다. 묵직한 배낭을 등에 메며 헉 소리를 냈고, 등산화를 신고 끈을 조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호텔 문 밖을 나서기까지는 분명 다시 걷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는데, 또 막상 걷기 시작하니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까미노 매직인 걸까. 다시 처음부터 걷는 기분. 처음 생장에 발을 들였던 날처럼 설레는 감정이 다시 피어난다.
레온은 아주 큰 도시다. 산티아고 성당 방향뿐만 아니라 다른 길의 표식도 많아서 두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집중해서 산티아고의 노란 화살표를 잘 따라가야 한다. 특히 우리 부부처럼 가이드북 하나 없이 노란 화살표만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같은 길만 뱅뱅 돌다가 곧잘 길을 잃게 되는 곳이 바로 이 레온이다. 그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기에 노란 화살표에 특히 집중하며 걸었다. 다행히 헤매지 않고 도심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 부부가 레온을 빠져나와 다시 자연 속으로 걸어가는 동안, 사람들은 레온을 향해, 도시의 중심으로 출근길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동안 순례길을 걸으면서 보던 작은 시골 마을의 여유로운 아침 풍경과는 사뭇 대조되는 낯선 분위기였다. 레온으로 들여가려는 사람과 레온에서 나오려는 우리. 육교에서 사람들 무리와 지나치며 나는 서둘러 레온을 빠져나왔다.
이따금 우리의 순례길 시작 날짜를 말해줄 때마다 다른 순례자들은 놀란 표정을 짓고는 한다.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우리만의 속도로 조급해하지 않고 걷는 중이다. 순례길 위에서 정답이라는 것은 없었다. 순례길은 이래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틀이 많이 깨졌으면 좋겠다. 나 역시 한국에서 알던 순례길과 내가 막상 걸어본 순례길은 정말 많이 달랐으니까. 저마다 길 위에 서게 된 이유와 걷는 이유, 일정 등이 모두 다르다. 그러니 순례의 모습도 다를 수밖에.
산티아고 성당까지 남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져서 남편에게 넌지시 물었다.
"앞으로 남은 길이 얼마나 돼?"
"300km정도? 지금 속도로 걸으면 15일 정도 걸리겠다."
"그거 밖에 안 남았어? 왜 이렇게 점점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지? 왠지 아쉽다."
"그만큼 강해진 거지.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야."
"..."
"난 네가 강한 사람이라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괜히 머쓱해져서 씨익 웃고 말았는데, 남편의 그 말 한마디에 마음 속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남편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너는 강한 사람이야." 내가 나 자신에게 주문 걸듯 가장 많이 되새겨온 말이기도 하고, 이 길 위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계속 들어온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와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걷고 있는 남편의 입으로 듣는 그 말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나의 성장을 인정받은 것 같았다.
지난 한 달간의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돌아보았다. 처음 시작할 때 걷기 싫어서, 힘들 것 같아서, 다리가 아파서 징징대고 인상 쓰며 걷던 내가 생각났다. 그리고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던 나날들, 마음이 고통스럽고 몸이 아프던 순간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매번 이제는 마지막인 것 같고 더는 못할 것 같았는데, 그 모든 시간을 온몸으로 겪으며 뚤혹 나아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안 하고 오늘의 걸음을 착실히 걷고 있는, 웃고 있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한 달간의 변화가 나조차도 믿어지지 않는다. 내게 아직 300km가 남아있어서 정말 기쁘다. 분명 힘들지만 힘든 게 전부는 아닌 나의 까미노. 걷다가 주저 앉아 울기도 여러 번 울었지만 그럼에도 매일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는 건 그만큼 이 길이 특별하다는 거 아닐까.
따로 믿는 신이나 종교는 없지만 영적인 힘은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길을 걸으면서 그 힘을 더 깊이 느끼고 있다. 오늘부터는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묵상하고 성찰하며 걷겠다고 남편에게 선언했다. 그려려고 온 길은 아니었지만 문득 그러고 싶어졌다. 이후부터의 길에서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새로운 경험보다 내 존재와의 대화, 성찰, 사색에 더욱 집중해보고 싶어졌다. 순례길의 후반부를 시작하는 것 같은 지금, 많은 자극을 받아들이기보다 조용히 내적인 영감을 채우는 데에 몰입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한걸음 한걸음 겸허한 마음으로 걸어야겠다. 나만의 새로운 까미노가 한번 더 시작되었다.
[한 달간의 걸음을 통해 내가 배운 것]
1.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2. 어쩔 수 없는 것들은 그저 흘러가도록 두자.
3.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다. 내가 가진 나의 힘을 믿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