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이 이혜림 Jul 28. 2022

Day39. 이 맛에 걷는 길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도저히 깨울 수가 없었어. 여보 그렇게 깊게 잠든 거 오랜만이잖아."


늦잠을 잤다. 왜 나를 깨우지 않았냐며 채근하려던 찰나, 남편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이틀 전 공립 알베르게에서 설잠을 잤던 나는 확실히 비싼 만큼 쾌적한 이 숙소에서 모든 긴장이 풀려 정신 없이 잤다. 자다가 갑자기 핸드폰 불빛으로 침낭 안을 비춰보게 했던 환촉에도 시달리지 않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엄청난 무게감에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물 먹은 솜마냥 육중하게 느껴지는 몸. 600km 이상을 40여 일간 걸어온 몸이다. 단 하룻밤의 숙면으로 기뿐해진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알베르게에서 단체 숙박을 할 땐 항상 긴장하고 있어서인지 피로감이 잘 느껴지지 않지만, 이렇게 모든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자고 일어난 아침이면 몸이 느끼고 있는 '진짜 피로감'이 확 체감된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이끌고 길을 나섰다. 평소보다 늦은 출발이지만 오늘은 17km만 걸을 예정이라 큰 문제는 없다. 당분간은 계속 산을 오른다. 평지보다 체력 소모도 심하고 힘들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아침 공기의 상쾌함이 확실히 다르다.


요즘 나의 최고의 행복이자 힐리은 출발하고 제일 먼저 만난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사 먹는 것.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보면 얼굴이 눈에 익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손을 들고 올라!하고 반갑게 인사하고, 가벼운 수다를 나눈다. 이제는 생장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사람들은 보기가 거의 힘들다. 있다 하더라도 걷기 시작한 날짜가 우리보다 한참 뒤인 5월의 순례자들. 4월 21일에 우리와 함께 출발한 이들은 이미 완주했거나 거으 막바지에 다다랐겠지? 그 생각을 하면 함께 초반부터 고생한 친구들과 끝까지 그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도 들지만, 또 그만큼 다른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어나가며 새로운 배움을 계속 얻는 지금도 만족스럽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내 속도대로 걷는 길. 내 속도대로 사는 삶. 그 말의 참 의미를 몸에 새기며 걷고 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 길을 걷는 사람인 내 남편과의 관계도 더 견고하게 다져가는 중이다. 연애 6년, 결혼 3년차지만 이 길위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몇 년간 마주한 시간들보다 남편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말 없이 둘이 걷다가 물소리가 아주 청량하게 들리는 냇가를 지나고 있었다. 바로 지나치지 못하고 냇가를 한참 바라보고 서 있던 남편이 이내 가던 길을 계속 걷는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불러 세웠다.



"여보, 여기에 잠깐 발 담가보고 가는 거 어때?"

"응! 나 사실 그래보고 싶었어!" 


신이 나서 냇가로 달려오는 그의 표정이 어쩐지 귀엽다. 이제는 바라만 보아도 남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어렴풋이 느껴진다. 남편은 냇가에서 잠깐이라도 발을 담그며 더위도 식히고 놀고 싶었을 테지만, 아마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하면 체력이 약한 내가 나중에 지칠까 봐 포기하고 그냥 돌아섰으리라.


두껍고 단단한 등산화를 서둘러 벗고 바지를 걷어붙이고 물안에 발을 담그고 섰다. 시냇물은 복숭아뼈 아래에서 찰랑거릴 정도로 얕고 맑았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라 그런지 시원하다 못해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으아아아, 차가워!" 행복한 비명이 절로 나왔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던 등줄기까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부터 무거웠던 몸도 한결 가벼워진다. 남편과 마주 보고 서서 한참을 웃었다.



"정민, 혜림! 여기 있었구나. 뭐해? 거기 시원해?"

"너무 더워서 잠깐 물놀이 중이야. 들어올래? 여기 시원해!" 

"우리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 갈 길이 멀어. 

너희는 이 길을 정말로 즐기면서 걷는 게 눈에 보여. 

아무런 압박도, 스트레스도 없이 행복하게 말이야. 

너무 예쁘다. 길 위에서 또 봐!" 



며칠 전 숙소에서 만난 뒤로 이따금 마주치고 있는 네덜란드에서 온 크리스와 톰. 양말 벗고 놀고 있는 우리를 보며 엄지를 치켜 세우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응. 내 생각도 그래."



요즘의 나의 순례길을 돌아보았다. 산과 물을 넘고 다리도 건너고, 수많은 마을과 도로를 지나왔다. 이 길이 참 힘들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언젠가부터 힘들수록 더 큰 기쁨과 감사를 느낄 수 있는 시간도 함께 왔다. '힘들고 괴로워'가 아니라, '힘들지만 행복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요즘은 숙소 테라스에 콕 틀어박혀 글을 쓰는 시간보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으며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잦아졌다. 함께 웃고, 함께 울고. 그렇게 함께 걷고 있다.


고도 1000m 이상의 산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시 오르다가 산 중턱에서 잠시 멈췄다. 턱 끝을 넘어 머리 끝까지 숨이 찼다. 이미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때 마침 산 위에서 아주 가느다란 바람이 불어왔다. 실바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연약한 바람이었지만,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기엔 충분했다. 힘을 내어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 진짜 힘들어 죽겠다."



절로 힘들다는 말이 튀어 나왔다. 여기서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알고 있다. 오늘도 나는 끝까지 걸어내리라는 것을. 바람이 불 때마다 멈추어 서서 쉬고, 바람이 멈추면 나는 다시 천천히 산을 올랐다. 끝없이 펼쳐진 오르막길 대신에 내 발끝만 보며 걸었다. 딱 세 걸음만 더 걷자. 딱 다섯 걸음만 더 걷자. 딱 열 걸음만 걷고 쉬자. 그렇게 내가 걸을 수 있는 걸음만 세면서, 쿵쿵 뛰는 나의 심장 소리를 느끼며 내가 오를 수 있는 속도로 산을 탔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힘겹게 오른 산 위에서는 아주 강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배낭을 벗어 던지고 두 팔 벌려 눈을 감고 내게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