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스페인에는 이상기온이 찾아와 매일 기온이 31도, 32도 이상을 찍고 있다. 이른 오전에도 무더위로 걷는 게 힘겨워져서 매일 아침 출발 시간이 점점 더 앞당겨지고 있다. 처음으로 새벽 6시에 길을 나섰다. 해가 뜨기는커녕 밤거리처럼 깜깜한 길을 걸었다. 사리아 도시를 빠져나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길목에 들어서고 나서야 해가 떠올랐다. 어둑어둑했던 풍경이 푸른 빛으로 맴돌다가 누군가 빨간색 물감을 한 방울 똑 하고 떨어트리고 간 것처럼 은은하게 물들고, 그제서야 자기 차례라는 듯 말갛고 동그랗게 떠오르는 해를 감상했다. 매일 보고 또 봐도 좋다. 일출과 함께 내 마음도 뜨거워지는 느낌. 일출이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인 줄 지금껏 모르고 살았다. 높은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찬 서울에서는 이런 하늘을 보기 어려우니까. 더위를 피해 부지런히 나왔지만 오늘도 강한 햇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참으로 힘들게 오래도록 걸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포르토마린. 사리아에서 24km 떨어져있는 마을로, 무척 아름다운 관광지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20Km만 걸어도 헥헥거리던 걷기 꼬꼬마가 아주 많이 컸다. 이제 24km 걷는 것쯤이야 무리 없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됐다. 분명 사리아부터였다. 그동안의 순례길과는 확연히 달랐다. 부쩍 순례길이 관광지화, 상업화가 짙어진 느낌이었다. 일단 알록달록 예쁜 조개껍데기와 각종 순례길 기념품을 상점마다 팔고 있는 것부터가 신기했다. 그만큼 순례길도, 길을 통해 만나는 작은 마을들도 모두 아기자기하게 예쁘고 무엇보다 활기찬 분위기다. 넉넉하게 자연을 공유하며 걸었던 길은 수십 명의 순례자들로 빼곡했고 왁자지껄했다. 무겁고 커다란 배낭 대신 기타와 값비싸 보이는 카메라를 목에 메거나, 작은 생수병 하나 들고 맨몸으로 걷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이전에 걸었던 호젓하고 여유로운 순례길이 문득 그리워지는 건 나뿐일까. 워낙에는 걷다가 힘이 들면 대충 배낭에 구겨넣은 비닐 한 장 꺼내어 앉아 신발도 양말도 벗고 발가락 까딱거리며 쉬던 나였다. 그런데 사리아부터는 어쩐지 나의 이런 행동이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동안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행동인데 이곳에서는 무례를 범하는 것 같아 망셜여졌다.
가볍게 피크닉 나온 느낌으로 총총 걷는 예쁜 사람들을 보며 내 모습을 갑자기 그들과 비교하기 시작한 것도 사리아부터였다. 꾀죄죄한 몰골로 화장도 못하고 새카맣게 탄 얼굴을 하고서는, 하도 세탁해서 다 늘어나고 색이 바란 옷을 입고 더러운 흙먼지가 쌓인 등산화를 신고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묶고 걷는 내 모습. 그 전까지는 순례길의 상징처럼 보였던 나의 남루한 몰골이 더는 자랑스럽지 않아졌다.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이 북적북적한 분위기와 다른 별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 어색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불편했다. 이건 '진짜 순례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당장 이곳에서 순례길을 끝내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저녁 먹을 무렵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내 순례길의 의미를 찾았고, 이젠 그냥 길이 남아있기에 걷는 것뿐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남편에게도 말 하지 모한 나의 진짜 속마음은, 역시 이 길도 하나의 관광상품이라는 걸 너무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보게 된 게 마음이 불편하고 속상했던 것 같다.
작은 산을 하나 넘고 돌길을 내려 왔다. 티끌 하나 없이 새파랗고 맑은 하늘 아래에 잔잔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오수 위 예쁜 다리를 건너고 만난 오늘의 마을, 포르토마린. 새하얀 돌벽으로 이뤄진 포르토마린이라는 마을은 이름만큼이나 무척 청량하고 아름다운 기운을 뽐내는 곳이었다. 이렇게 예쁜데 사람들이 많이 찾을만하구나. '순례는 순례답게'라는 이기적인 나의 마음은 고이 접어 가슴 속에 묻어버리기로 했따. 아무 의미 없이 내가 함부로 이 길을 걸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에 의기소침해 있을 때 생장의 순례길 사무소에서 '누가 뭐래도 너는 이제 이 길의 순례자'라고 행운을 빌어준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오늘 내가 마음대로 세워둔 또 하나의 틀이 깨졌다. 세상에 '순례다운' 순례는 없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순례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