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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l 31. 2022

Day45. 꼭 크리스마스 이브같아



아침에 일어나는데 몸이 너무 힘들었다. 몸살이 찾아온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온몸을 두들겨 맞았는데 약도 못 챙겨 먹은 느낌이랄까. 급할 것도 없으니 천천히 나가자며, 부지런한 순례자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조금만 걸을까 아님 하루를 쉴까, 이런 고민은 이제 하지도 않는다. 걸어도 힘들고, 걷지 않아도 힘들다. 어차피 힘들 거라면 차라리 걷고 힘든 게 낫다. 경험해보니 알게 된 것들이다. 그래서 몸은 무서질 것 같지만 오늘도 걷는다. 여전히 남편의 꼬리뼈가 회복이 덜 되어 배낭은 미리 보내고서 천천히 가볍게 걷기로 했다.



"오늘 왜 이렇게 힘이 안 나지?"

"오늘의 커피를 아직 못 마셔서 그래."



오늘만큼 카페인 수혈이 간절한 적도 없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면 다 괜찮아질 것 같다. 그런데 사리아부터 부쩍 높아진 순례자 밀도에, 하필 또 비까지 오는 바람에 카페에서 빈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카페 구석의 자리를 찾아 커피 한 잔을 하고 다시 힘을 내어 걸었다. 빗물을 흠뻑 머금은 숲속의 길은 촉촉하고 상쾌했다. 숨을 한번 크게 깊게 들이마실 때마다 온몸 구석구석 싱그러운 기운이 채워졌다. 물안개 피어오른 숲길은 한껏 몽환적인 분위기를 뽐냈고, 평소보다 게으르게 출발한 덕에 길은 비교적 한적했다.







"좋다"




정말 좋을 땐 단순한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좋다는 말만 연신 내뱉으며 이 아름다운 순간에 감탄했다. 예쁜 길을 힘들어하지 않고 걸었다. 20km쯤이야 5시간이면 도착하지, 가볍게 생각하며 걷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는 45일 전의 나보다 성장한 것 같다. 길 위에서 또 석진 오빠를 마주쳤다. 석진 오빠 곁에는 우현오빠도 있었다.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잠시 외국에 나온 김에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우현 오빠는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말들이 웃겨서 주변 사람들을 배꼽 잡고 웃게 만들어버리는 유쾌한 사람이다.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생장 가는 기차표를 샀어요. 생장이라고 해서 내렸는데, 순례자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웬 바닷가가 있는 거예요. 그제서야 잘못된 걸 깨달았죠. 표 산지 6시간 만에."



우현 오빠가 말해주는 순례길 경험담은 누구보다 짠 내 폴폴 나면서도 유쾌했다. 장난과 농담 속에 슬그머니 진심을 꺼내든 우현 오빠의 카드 아래 모두가 각자 숨겨둔 짠 내 나는 순간을 꺼내 들었다.



'메세타 지역에 들어섰는데, 문득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한 거야. 헤어진 여자친구 생각하면서 혼자 통곡을 하며 걸었어요. 그 긴 길을."

"저는 오르막길을 앞두고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마냥 슬퍼서 운 건 아니고, 이렇게까지 날 것의 내 모습을 대면해본 적이 살면서 한 번도 없었으니까. 걷다 보니 꽁꽁 숨겨둔 감정들이 막 수면 위로 올라왔던 것 같아요."



서로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왔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그게 어떤 것이든, 어떤 말이든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다들 그렇게 짠 내 나고 지지부진한 과정을 거쳐 조금은 단단해진 모습으로 걷고 있었으니까.


꽉 찬 식당들을 여러 군 데 거치고 나서야 우리 네 사람이 식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여러 날, 많은 시간을 우연처럼 인연처럼 마주친 우리 사이에는 어느덧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내일이면 완주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들떠있었던 것 같다. 아주 작은 것에도 웃음 폭탄이 터졌다. 나의 몸과 마음은, 45일 만에 완전히 무장해제되었다. 내일은 이 순례길의 마지막 날. 산티아고 데 콤보스텔라 성당에 도착하는 날이다. 완주 전날 밤인 만큼 특별한 기분으로 우리 부부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부러 알베르게가 아닌 호스텔의 더블 룸을 예약해두었다. 침낭이 아닌 포근한 이불과 베개가 깔린 침대에서 대자로 뻗어 편히 잘 생각을 하니 설렌다.






"혜림 씨, 정민 씨. 이 지역에 돌판 위에서 구워 먹는 진짜 맛있는 스테이크 집이 있대요.

 오늘 저녁에 또 뭉칠까요?"



거절한 이유가 하나도 없다. 길 위의 '인싸'였던 석진오빠는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인 여러 명을 더 데려왔고. 처음 만나는 6명의 한국인이 순례길 위 작은 마을 스테이크집에 모였다. 너무 웃느라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카미노는 왜 걷나요, 몇 살이에요, 이제 어디로 갈 거에예요, 하는 질문들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도 필요도 없었다. 우리의 할 일은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단 하루, 완주 전날의 특별한 이 순간을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 그동안 잘했어, 잘 걸어왔어,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주는 것. 이토록 편안하고 즐거운 만남이라니! 좋은 숙소에, 맛있는 음식에, 좋아하는 사람들까지. 마치 꼭 크리스마스를 앞둔 듯한 들뜬 기분이었다. 다신 없을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일 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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