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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l 17. 2022

Day16. 길 위에서의 생일


오늘따라 유난히 동 트기도 전에 부지런히 길을 나서는 사람이 많았다. 왜 그랬는지는 직접 걸으면서 깨닫게 됐다. 오늘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땡볕의 평지를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아주 고된 코스의 날이었다. 힘들 법도 한데 오늘만큼은 모든 게 다 괜찮았다.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생일을 까미노 길 위에서 맞이하는 행운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아직 잠에서 덜 깬 채로 이른 새벽부터 시작하는 걸음도, 그늘 한 점 없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버리고야 마는 고단한 길도 오늘은 정말이지 다 괜찮았다. 


아침에 걷다가 제일 먼저 나오는 카페에 들어가 그날의 첫 커피를 들이켜는 건 어느새 우리 부부의 즐거운 모닝 루틴이 되었다, 오늘도 걷다가 제일 먼저 보인 카페에 들어갔다. 마침 먼저 온 리오와 데비가 아침 식사 중이었다. 또다시 우연히 만나 함께 신이 나서 아침부터 떠들고 있는데, 뒤를 이어 세르비아에서 온 스테파니 부부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어제 알게 된, 아이를 갖기 위해 열심히 'working'중이라던 커플. 알고보니 스테파니 부부와 리오 데비 부부는 이미 길 위에서 만나 친분이 깊은 사이였다.


"데비가 어제 진짜 러블리한 한국인 커플을 만났다고 했어. 나도 만나면 좋아할 거라고 했는데. 난 데비한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커플이 분명 너희 둘일 거라고 생각했어."


스테파니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모두 내 친구라니, 아침부터 분에 넘치는 행복을 느꼈다.



"혜림, 손 내밀어봐."



스테파니의 남편, 스테판이 재밌는 것을 발견한 것마냥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또 장난을 치려나 싶어 눈을 흘기다가 못 이기는 척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 손바닥 위에 툭 하고 떨궈진 것은 작은 쿠키였다. 

"생일 축하해"


데비의 초콜릿도, 스테판의 쿠키도, 너무 소중하고 아까워서 나는 도저히 먹지 못할 것만 같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나를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정하게 챙겨줄 수 있는 걸까. 순례길 위에서는 감정이 제멋대로 증폭되는 것 같다. 내가 작은 쿠키 하나에 울음을 터트리려는 걸 알아챘는지 스테판은 음료를 주문하다 말고 갑자기 큰 목소리로 카페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친구 생일이에요! 커피 한 잔 서비스로 주시면 안돼요?"



스테판의 자신감 넘치는 농담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스테판이 가진 매력이다. 한순간에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넉살. 카페 주인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분위기를 무마시키다 보니, 내 눈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쏙 들어가버렸다.


"또 만나, 길 위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인사를 나누고 남편과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침의 행복했던 티타임 이후로 잔인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바람 한줄기 불지 않는 날에, 땅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의 평지를 끊임없이 걷고 또 걸었다. 등허리가 땀으로 흠뻑 절여질 만큼 맹렬하게 더운 날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남편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다.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걸어오던 순례자가 나를 보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순례자의 노래가 끝나자, 바로 그 옆에 있던 순례자가 노래를 이어 부르기 시작했고, 지나가던 다른 순례자들도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 서서 노래를 불렀다.



"무슨 일이야?"

"오늘 이 친구 생일이래!"

"와우! 생일 축하해!" 



그렇게 돌림노래처럼 길 위에서 한참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생일 축하 노래를 선물 받았다. 흥이 오른 한 순례자는 내 손을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했고, 우물쭈물 부끄러운 마음도 잠시, 발그레해진 두 뺨 위로 어느새 웃음이 번졌다. 흥과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흥겨움에 몸을 들썩이던 우리 곁에 모두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다같이 손을 잡고 큰 원을 그리며 춤을 췄다. 그 순간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단순한 순례길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생일파티 장소가 되었다.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노랫말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무사히 내게 닿았다. 모두 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즐기며 기뻐해주고 있었다.


생애 최고의 생일이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생일 축하를 받을 수 있을까. 그것도 길 위에서, 다 함께 어깨춤을 추면서 말이다! 생전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아침부터 내게 준 감동이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벅찰 만큼 가득 채워지는 행복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어젯밤 데비가 초콜릿을 내 손에 쥐어준 순간부터 꾹꾹 눌러 참아온 눈물이 결국 이곳에서 터져 버렸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생일이었다. 세상에 뭐 이런 길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다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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