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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ul 15. 2022

Day8. 내게 찾아온 손님, 베드버그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밤에 깊이 잠든 사이에 베드버그에 물린 것 같다. 갑자기 손목과 목 부근이 미친 듯이 가려워서 잠결에 아무 생각 없이 벅벅 긁었다. 그러다 느낌이 이상해서 눈을 번쩍 떴다. 긁던 손목을 휴대폰 불빛으로 비춰보니 이미 발갛게 부어올라 있다. 물린 자국이 많았는데 꽤나 규칙적으로 정렬된 모양새다. 혹시 이게 말로만 듣던, 그 명성이 자자한 베드버그님? 서둘러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검색된 사진 속 베드버그에 물린 자국과 내 팔에 물린 자국이 엇비슷해 보였다. 몇 년간 배낭여행을 다니며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베드버그를 순례길 여정 일주일 만에 만나게 되다니. 그것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이토록 힘든 시기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어서 정신 차려야해! 


덕분에 이른 기상을 했다. 서둘러 마당으로 나가 침낭과 외투를 탈탈 털어 정리하고,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벗어 비닐봉지에 따로 담았다. 오늘은 되도록 빨리 걸어가서 숙소 체크인을 하고 모든 소지품과 옷들을 세탁해서 햇볕에 말리기로 했다(인터넷에서 찾은 베드버그 퇴치법이다).


양손 가득 옷가지가 담긴 비닐봉지를 대롱대롱 매달고 걷는 오늘의 길. 시착부터 축축 처진다. 남편의 작은 농담도 받아주지 못할 만큼 나는 몹시 지쳐있었다. 숙소가 너무 추워서 밤새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도 못한 상태인데, 게다가 베드버그라니, 오늘 숙소에 도착해서도 쉬지 못하고 소지품과 옷가지들을 세탁하고 또 말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너무 피곤하다. 유난히 가려운 팔목을 박박 긁어가며 약국은 또 언제 찾나, 더 아파지면 어쩌나, 베드버그가 배낭에 딸려 와 알을 깠으면 어쩌나 등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제는 정말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매일 체력적 한계에 이르러 울컥할 때마다 꾸역구역 참으며 눈에 힘주고 걸어온 길이었다. 나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길 와서 이 고생인 거지? 다 포기하고 이젠 그만 멈추고 싶어졌다. 베드버그도 무섭고, 더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도 싫고, 몸도 너무 힘들다. 드디어 그만둘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만약 남편은 남아서 끝까지 걷고 싶다고 한다면, 나는 근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에서 혼자 여행하며 기다리면 되겠다는 결론까지 섰다.


한 발 앞서 걷고 있는 남편을 불러 세웠다.



"여보, 나 너무 힘들어. 순례길 그만 걷고 싶어. 이제 그만 할래."

"힘들지? 살면서 이렇게 오래 걸어본 적도 없는 여보가 나 때문에 정말 고생이 많네."


내 마음을 단번에 알아주고 어루만져주는 남편의 말 한마디에 코끝이 찡해졌다.


"그런데, 정말 그만 걷고 싶은 거야?"



막상 그렇다는 대답이 단번에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쉽게 그만 걷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내가 부끄럽고 창피해졌다. 나를 몰아붙이는 벅찬 업무나 숨통을 쥐고 흔드는 심각한 사안도 아니고, 고작 이 순례길을, 고작 일중리 걸어놓고 고작 베드버그에 조금 물렸다고 해서 '나 그만 둘래'라고 말하는 꼴이라니.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분명 혼자 속으로 생각할 때는 세상 모든 게 심각했는데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초라하고 볼품없어졌다.


나는 여태껏 늘 도망치면서 살았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서 그저 그 상황을 빨리 빠져나오고 싶어 줄행랑치느라 알아채지 못했는데, 되돌아보면 늘 힘든 상황에서 조금 더 버텨볼 생각은 하지 않고 도망치는 선택지만 안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게 나라는 게 절절히 느껴졌다. 늘 도망치는 사람, 힘든 건 안 하는 사람. 견디지 못하는 사람. 약골.


그런데 어쩐지 이번에는 조금 다르고 싶어졌다. 시작은 남편의 제안이었지만 함께 걷기로 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힘들다고 생각했던 이유들이 사실은 굉장히 볼품없고 초라한 핑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이상하게 용기가 났다.



"아니. 조금 더 걸어볼게."



진짜 더는 버티기 힘든 순간이 오면 그때 그만두어도 늦지 않다. 일단 오늘만이라도 조금 더 걸어보자. 그런 결심이 섰다. 남편의 뒤에서 혼자 흙길을 걸으며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봤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베드버그에 물린 것. 그러나 이건 이미 일어난 일이고, 더 이상 되돌릴 수도 손을 쓸 수도 없다. 그 알베르게에 묵지 말걸, 침낭 단속을 좀 더 단단히 하고 잘걸, 자기 전에 매트리스 확인을 해볼걸, 하며 과거의 선택이나 결정을 후회하고 자책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고 현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아직 가려움이 심하지 않으니 일단 숙소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옷과 소지품을 모두 꺼내어 살균 소독을 하자. 이미 물린 걸 되돌릴 순 없지만 재발을 방지할 수는 있으니까. 그리고 증상이 심해지면 약국에 가서 약을 구입하자. 그리고 앞으로는 숙소에서 체크인 하기 전에 벌레가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후기도 잘 살펴보면서 조심하자.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정리하니 마음이 이내 차분해졌다. 그제야 길 위의 풍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간 나의 터무니 없는 투정을 받아주고 내 무거운 짐까지 넘겨 받아 걷느라 힘들게 걷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순례길은 내가 원했던 여행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늘 미안해해던 남편이었다. 고마운 남편의 존재.


이상하다. 분명 나의 상황은 오늘 아침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다. 이따금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는 산들바람도 좋고, 두 눈이 시원해질 만큼 푸르고 넓은 언덕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게 느껴졌다.


모든 소지품을 바닥에 꺼내 놓고 햇볕에 말릴 수 있는 것들은 몽땅 말리고, 세탁 가능한 것들은 모조리 세탁기에 넣었다. 알베르게에 있는 건조기가 고장 나서 쓰지 못한 게 아쉽지만 오늘 난 최선을 다했다. 여러 번 세탁을 하고 나니 어느덧 하루가 다 갔다.


온통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던 아침. 순례길을 걷기 전 내가 가진 두려움 중 하나는 베드버그에 물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두려워했던 일이 실제로 닥치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생각보다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놀랐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 두드러기가 퍼지거나 가려움이 심해질지도 모르지만일단 오늘은 참을만하다. 이제 내일 걱정은 내일 하기로 한다. 오늘은 오늘의 일만 해결하고 자면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조건적으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포장하고 싶지 않다. 생각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피곤한 순간들이 많다. 매 순간이 낯섦의 연속이다. 환경도, 만나는 사람들도 낯설지만 가장 낯선 것은 그동안 몰랐던 나 자신과의 대면이다. 나도 몰랐던 날것의 내 감정, 생각, 모습과 자주 만난다.


처음에는 그저 무사히 다치지 않고 이 길을 완주할 수 있기만을 바랐지만 이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의 완주는 내게 별로 중요치 않아졌다. 이 길을 어떤 마음을 가지고 걷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아까 오후에 빨래를 널면서 나는 내게 주어진 퀘스트를 하나 깼다는 느낌이 들었따.

걷다가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지나가던 순례자가 걷던 길을 되돌아와서 내게 카메라가 있는지 물었다. 지금 너희들이 있는 곳의 모습이 꼭 '파라다이스'같다며,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고 했다. 어리둥절해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건넸다. 그녀가 찍어준 사진 속 우리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뭐든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딱 맞는구나. 그런데 여기, 정말 파라다이스 맞아요?





가장 괴로웠던 날에 찍은 사진이 가장 예뻐서, 내 책의 표지가 됐다. 이런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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