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이강인 대결구도가 서사로 만들어지는 과정
1. ‘언어로 통치되는 세상’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이강인 선수 사건을 계속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 이선균 배우를 나락으로 몰고 갔을 때처럼 우리는 지금 거대 집단의 몰지성적 태도, 미디어의 분별없는 횡포를 방관하고 있습니다.
2. 제가 페북에서 포스팅을 이렇게 자주 하지 않는데.. 이 사건은 너무나도 성급하게 재능 많은 22살의 청년을 추락시키고 있기에.. (어쩌면 당사자들이나 우리 모두 며칠 동안 뭐가 뭔지도 모르고 상황을 악화시키고만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에 글 하나를 급하고도 길게 작성해서 화살처럼 쏘아 올립니다. 상황을 전환시킬 누군가로부터 읽히고 참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3. 우선 키워드 검색으로 해당 보도기사의 최근 헤드라인만 훓어보니 손흥민 선수는 “천성적으로 착한” “훌륭한” “최고의” “진정한 리더” 등의 유사어로만 수식됩니다. 토트넘 구단 감독의 말, “리더는 좋은 말만 할 순 없다” “쏘니는 역시 쏘니”가 인용됩니다. 특별하고도 인용할 만한 누군가의 말을 그렇게 끼워두면 진실처럼 보이는 효과가 쉽게 만들어지죠. 말에 말이 포개지면서 담론의 프레임이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수사전략입니다.
4. 그에 반해 이강인 선수를 둘러싼 워딩은 광고업계가 “손절”하며 포스터를 “철거”하고 “충돌” “불화” “문제” “민폐” “악플” 등의 부정적인 텍스트로 가득합니다. ‘충돌’과 ‘불화’는 혼자서 만들 수 없을텐데 기사에 배열되어야 하는 텍스트의 순서, 상황적 서술은 모두 얄팍하기만 합니다. 인용처와 논증이 빈약하니 “이강인은 사과했지만 손흥민, 황희찬, 김민재의 단호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는 대립과 고립의 구도만이 과장됩니다.
5. 선과 악, 이편과 저편과 같은 이항대립은 오랜 세월 복잡하거나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세상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또는 모호한 실재를 접근할 만한 삶의 사건으로 극화시키는 의미구성방식이었습니다.
6. 이강인 선수 사건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만한 갈등과 충돌은 새롭지도 않으며 해석의 여지가 분분한 모호하고도 복잡한 의미덩어리일텐데.. 단 2-3일만에 손흥민(선)-이강인(악)의 대결구도로 선명하게 서사화되었고.. 그걸 정당화하는 기호표현이 사방에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신이 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7. 사건이 보도된 첫날만 보더라도 손흥민-이강인의 대립 구도는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젠 다수 기사가 이강인 선수 때문에 손흥민 선수가 손가락 탈구, 심적 고통을 겪었다는 인과관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8. 특히 오늘 기사를 보니 손흥민 선수가 지난 일주일 동안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며 “응원, 환영 받아서 영광이었다”란 헤드라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밝게 웃는 표정의 사진과 함께 말입니다. 미디어는 ‘하극상’ 혹은 ‘악행’의 고초를 견디고 이겨낸 영웅의 서사를 다급하게 구성하는 중입니다.
9. 그런 기사와 이미지를 보니 손흥민-이강인을 둘러싼 갈등 혹은 불균형은 이강인 선수가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고 다시 영웅의 품에 안기는 순차적인 서사문법으로 서둘러 종결되겠다 싶습니다. (뭐가 진짜인지는 여전히 복잡하고 이쯤 되면 아마 당사자들도 뭐가 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사람 심리가 그렇습니다. 사방에서 포획하고 압박하면 실제와 재현물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10. 우린 알게 모르게 영웅 서사의 규칙체계에 익숙합니다. 특히 미디어는 그걸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내면화시키죠. 게다가 (대결구도와 문제-해결의 서사 문법으로 이념화된) 성난 군중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이번 사건이 종결되길 요구할테니 이강인 선수도 모두가 원하는 극화 안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11. 그렇지만 이번 사건이 손흥민 선수만의 신화적 의미체계 안으로 깔끔하게만 포섭된다면.. 저는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황당하기조차 합니다. 어쩌면 이강인 선수는 앞으로 배트맨 역할의 손흥민 선수 옆을 지키는 로빈으로만 남을지 모르겠네요.
12. 앞서 포스팅한 글처럼 공적 영역의 예의와 기득권력으로부터 교정된 '착한 품행'은 다른 속성입니다. 착한 품행을 지나치게 의식할 때 이강인은 이강인이 아니게 됩니다. 미디어는 갈등의 다음 국면, 종결의 과정에 집착할텐데 어린 이강인 선수가 과연 자신만의 의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3. 균형-불균형-균형, 혹은 배경-문제-갈등-해결의 순차적 문법이 우리 머리속에 꽉 박혀서 그것만이 당연한 세상의 질서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불균형이나 갈등, 혹은 원인-결과나 문제-해결의 전말이 단 하나의 실재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그건 지배적인 권력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14. 손흥민-이강인의 대결구도는 미디어에서 철저히 재현된 것일 뿐입니다. 미디어가 대결의 서사로 과도하게 의미화시킨 것이죠. 그걸 모르기도 할 것이고, 물론 눈치껏 안다고 해도 당사자가 유명인이라면 세상에서 재현되고 소비되는 익숙한 서사문법을 거슬리기가 어렵겠죠.
15. 대한민국에서 김연아와 손흥민은 건드리지 말라는 어떤 기사의 댓글이 생각납니다. 반듯해 보이는 그들을 건드릴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만 누군가를 파르마코스(희생양)로 삼는다면 그럼 얘기는 달라집니다. 그건 해당 서사의 악인 캐릭터를 맡은 개인과 가족에겐 너무나도 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결투를 조장하고, 한쪽이 선택되면서 다른 쪽을 무릎을 꿇게 만드는 식민주의 논리는 제게 한없이 가혹하게만 보입니다.
16. 신간 <<버티는 힘, 언어의 힘>>에서도 파시즘 수준의 미디어 텍스트에 대해 논평한 부분이 있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에게 편향적인 판정으로 금메달을 따지 못했을 때 얘기입니다. 저도 그때 판정단의 비윤리적 처사에 화가 났지만.. 그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발휘되는 집단의 결의가 정말 살벌하고도 불편했었습니다.
17. 사건의 배경만 다를 뿐 파르마코스는 그렇게 늘 호출됩니다. 심판이든, 감독이든, 선수든, 어떤 개인이 특정되고 화가 크게 난 집단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합니다.
18. 저는 손흥민과 이강인 둘 사이에 그어진 굵은 선이 안타깝습니다. 두 선수는 미디어의 개입으로부터, 혹은 지배적인 담론질서로부터 고난을 감수한 선한 영웅과 무모하고 되바라진 악인으로 드라마화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그런 드라마에 몰지성적으로 참여하고 있거나 마치 TV드라마 보듯이 이강인 선수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19. 이럴 땐 다른 말과 글, 다른 시선과 주장이 어디선가 또 누군가로부터 계속 끼워지면 대결구도의 엄중한 각본이 탈색될 수 있는데.. 선수들이나 이해당사자들이 화난 군중 앞에서 잔뜩 겁먹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그것도 한없이 측은하고 또 무섭게 보입니다.
20. 다른 말이 들리지 않으면 동일한 프레임이나 익숙한 가치가 계속 선택됩니다. 청군-백군 운동회에선 시간이 갈수록 응원 소리가 점점 커지죠. 그럼 어느 때부터 양분된 진영의 거센 고함 소리 말고는 어떤 말도 끼워넣기 힘듭니다.
21. 이번 주말이라도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다른 말을 보태면 좋겠습니다. 같은 말만 선명하고도 크게 들리고 있어요.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위치에 계신 분이 목소리를 높여 주세요.
22. 성난 군중에 속해 있다면 손에 움켜지고 있는 돌맹이를 제발 내려 놓으세요. 화 한번 내지 않았고, 싸움질 한번 안한 사람만 돌을 던지세요. 이러다가 사람 죽어요. 이강인 선수나 손흥민 선수나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긴 글을 급히 작성하느라 예시나 논술이 허술할 수 있는데.. 보다 구체적인 부연설명이 필요하다면 아래 단행본 챕터를 참조해주십시오.
-2장과 3장. <<미학적 삶을 위한 언어감수성 수업>> (신동일, 2022, 필로소픽)
-13장과 15장, <<담론의 이해>> (신동일, 2020,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