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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일 Feb 23. 2024

언어와 권력 16

"이강인 감싼 대인배 손흥민" 다시-보기

1. 예상대로 이강인 선수가 손흥민 선수의 품에 안기면서 용서를 받고, “이강인 감싼 대인배 손흥민”과 같은 헤드라인이 넘치면서 사건이 일단락되었습니다. 


2. 사건의 전말이 여전히 분명하게 보도되지 않아서 (왜 그럴까요? 이것 또한 흥미롭습니다.) 추론이 쉽지 않지만 서로 화해하는 과정이 참 아쉽습니다. 자료를 엄밀하게 수집해서 이번 사건을 둘러싼 미디어 기호, 담론, 의미의 생성과 권력질서에 관한 논문을 한번 써볼까 싶습니다. 마침 이번 학기에 ‘담화와 서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어서 학생들과 토론도 해볼 참입니다. 


3. 서로 화해한 아름다운 장면을 두고 분석적으로 논평해서 좀 송구합니다. 저도 두 선수의 경기를 자주 보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선수들입니다. 특히 박지성 선수부터 손흥민 선수까지.. 이전과는 다른 주장 리더십을 발휘하여 경직된 선후배 관계에 변화가 시작된 점을 참 멋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언어, 권력, 통치에 관한 연구자로서 (우리의 언표와 실천을 통제하는) 지배 담론들이 불연속적으로 단절되고 전개된다는 것을 알기에 어쩌면 손흥민-이강인 충돌 사건이 새로운 사회문화적 지층으로 우리를 이끌지도 모른다고 주목했습니다.


4.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가정, 학교, 직장 등에서 기득권력과 품행의 교정에 관해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제가 수년 동안 잘 챙겨준 지도학생과 중요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어느 날 그걸 준비하는 학생의 품행이 마땅치 않아서 혼을 내고 멱살을 잡는다고 합시다. 그는 거칠게 뿌리치고 그때 제 손가락을 다친 일이 있었다고 가정합시다.


5. 지도학생이 찾아와서 고개를 떨구며 사과하고 지도교수는 애써 용서를 한다면 그건 구시대의 관행이었습니다. 요즘 대학 분위기로는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학생에게 공개적으로 호통을 치고 멱살을 잡는 행위를 상상하기 힘듭니다. 교수 입장에서야 아끼는 마음으로 그랬다고 변명하겠지만 학생은 갑질을 당했다며 모멸감을 호소햘 것입니다. 교수도 온전한 품행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걸 가까이 일하는 학생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고요. 


6. 많은 분들이 우승을 향한 목표, 국가 대항전이란 엄중한 상황, 국가를 대표하는 주장/선수에 관한 책임과 의무를 자주 언급합니다. 그러나 국가대표뿐만 아니라, 대통령이든, 정당 대표든, 동문회장이든, 전교회장이든, 사장이든, 왕고참이든, 누구든 자기가 통제하려는 사람을 위력적인 언어와 기호를 당연하게 사용해도 되는 건 아닙니다. 우승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성취를 획득하기 위해서) 위력이 행사되고 성난 군중이 감독이나 선수의 품행을 강압적으로 교정시키는 사회질서는 저로서는 몹시 불편한 경관으로 보입니다.


7. 욕이든, 고함이든, 노려보는 표정이든, 멱살을 잡는 것이든, 또 뿌리치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든, 모두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위압적인 행위이며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아랫사람(후배, 학생, 직원, 자녀)만이 잘못한 문제가 아니라 윗사람(선배, 교수, 사장, 부모) 역시도 개입된 쌍방과실입니다. 경찰서나 법원에 가보세요. 분쟁과 싸움이 있는 어디든 단 하나의 일방적인 진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길 가는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뒤에서 후려치는 사건이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8. 고함을 지르고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두를 만큼의 긴장과 갈등이 필요하고, 누구도 그걸 사전/사후에 화해시키고 조정하지 못하며, 군중이 억세게 개입하고 비난하며, 그런 중에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가서 선배님의 품에 안긴 후에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할 만큼의 국가대표 신분이라면 우리는 국가, 스포츠, 국가대표팀에 관한 여러 질문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9. 팀 내부의 소통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축구판에서도 고민하겠지만 바깥에 있는 우리로서는 우선 대립과 소외를 부추기는 나쁜 미디어부터 경계해야 합니다. 누구나 어디서나 이강인처럼 단번에 매장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학계는 우리가 보다 심각한 사회적 비용을 감수하기 전에 서로 다른 삶과 권리, 차별과 가해, 미디어/리터러시 등을 두고 교양/시민 교육을 강화할 필요를 상기시키고 실제적인 교육과정을 준비해야 합니다. 


10.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국가 대항전 문화에 대해서도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이번 아시아컵 대회에서 성난 군중은 이강인 선수를 고립시키기 전에도, 단 며칠 만에 조규성 선수를 바보로 만들었고, 클린스만 감독의 웃는 태도를 두고 저주했습니다. 


11. (워낙 살벌한 분위기라서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지만 저는 다른 건 몰라도 클린스만의 말과 태도는 지켜보기 좋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 팀의 감독으로 직관할 수 있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늘 무서운 표정과 우는 얼굴만 봐야 하나요? 경기에 지고선 상대편 감독에게 웃으며 축하해주면 안되나요? 지금보다 얼마나 더 강하고 부유해야 우린 서로 다른 표정을 허락할 여유를 가질 건가요?) 


12. 싸움을 부추기는 인플루언서 영상을 지켜보고 클릭할 바엔 각자 동네 공원이라도 나가서 배드민턴을 치든가, 요가 선생님에게 새로운 동작이나 배우면 좋았겠지만.. IT 강국, k-콘텐츠 자부심으로 가득한 대한민국의 네티즌 다수는 모니터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강인이 소속팀에서 방출된다거나 손흥민 이외의 다른 선배와 불화라는 허위기사는 단 몇 시간만에 수십만명의 조회건수, 수천개의 댓글을 기록했습니다.


13. 갈등과 소란이 발생한 후에 선임이고 주장이고 더 많이 유명한 손흥민 선수의 신화적 의미체계가 며칠 동안 미디어 공간을 압도적으로 지배했고, 사과-용서의 과정에서도 우선적인 위치성을 차지했습니다. (분량이 길어질테니 인스타그램의 입장문 텍스트를 언어학적 차원에서 논평하진 않겠습니다) 


14. 대중 미디어와 시장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강인 선수는 영웅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학계, 정계, 경영 현장에서 비슷한 일이 생겼다면 다른 드라마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대중주의나 자본주의에 자유로울 수 없는 축구선수로선 시간을 더 끌거나 다른 이해당사자들의 개입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겠죠.


15. 솔직히 제가 가장 기대한 모습은 둘이 동등하게 ‘서로’ 사과하고 ‘함께’ 약속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둘이서 찍은 사진은 그런 기호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로만 보면 권력질서는 사진의 모습과 아주 다릅니다. 이강인 선수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사과했고 손흥민 선수는 “강인이가 진심으로 반성”했다며 용서하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16. 정말 신뢰하는 친구 사이라면 다툴 수도 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유명 선수라면 그만한 다툼을 두고 굳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라고 부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과와 용서의 방향은 단선으로 단정되었고 손흥민 선수가 “강인이 용서해주세요”라며 호소합니다. 그러면서 이번 사건의 가해와 피해, 중심과 주변, 원인과 결과는 선명하게 구분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디서도 사건의 전말에 관한 보도가 없습니다.)


17. 그들이 ‘인스타그램’ 매체를 선택해서 캐주얼한 옷차림과 웃는 표정으로 어깨동무를 하며 수평/정면 각도로 화면 바깥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관람자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유도합니다. 제가 보기엔 그게 글에 드러난 편향적인 권력질서를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잘 감당했습니다. 사진으로 만들어진 시선의 벡터가 없었다면 어떤 해석이 분분했을지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글로 치자면 마치 양태의 장치 없이 단정적으로 전달되는 평서문과 다름 없었을 것입니다. (대중매체의 이미지 효과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18. 기호나 말이 배치된 ‘스타일’로만 보면 친밀한 형태의 사과이고 용서로 보였지만 그들이 싸우고, 사과하고, 용서하는 서사는 우리에게 그런 분쟁이 발생했을 때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에 관한 올바른 품행의 지침(이데올로기)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것처럼 축구장 밖의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번과 같은 품행 교정이 축구장 안팎에서 얼마나 유효할 지는 더 지켜봐야 합니다.


19. 저는 청년들이 이걸 어떻게 지켜볼지 참 궁금합니다. 요즘 청년들은 세상에서 목격되는 꼰대, 갑질, 위계적 질서에 대해서 대단히 불편한 심경을 토로합니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미디어에 드러난 나쁜 남자 스타일, 까탈스러울 듯한 벤투 감독 스타일의 리더십, 멱살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는 손흥민 선수의 태도 등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입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기사나 영상의 댓글을 보면 그런 모순된 태도가 읽혀집니다.  


20. 한번 구축된 신화 수준의 의미구조, 혹은 지배적인 담론질서는 잘 바뀌지 않았습니다. 자본과 미디어의 후광으로 손흥민 선수를 칭송하는 신화구조는 딴딴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손흥민이란 이름을 가진 주장, 선임, 월드 클래스 선수 위치성에 천하의 이강인 선수라도 어쩔 수 없었죠. 이강인 선수뿐만 아닙니다. 축구 본고장에서 맹활약 중인 ‘손흥민’이란 이름의 문화권력은 우리 다수의 내면에도 몰지성적으로 이입되었습니다. 


21. 이런 담론장에서 이강인 편에 들거나,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자거나, 다른 해법을 찾자는 말을 보태기 어렵습니다. 어떤 문화 아이콘이라도 다수가 환호하는 권력이 되었을 때 딱 그만큼 더 위험해지는 통치사회의 징후를 목격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손흥민’에 대한 환호를 막을 순 없겠지만 다른 선수들도 더 유명해지든가, 축구뿐 아니라 다른 문화예술 분야도 각광을 받든가, 아니면 전 국민적으로 조기축구 붐이라도 일어나서 축구 볼 시간에 직접 볼을 더 차는, 이래저래 다른 경관과 다른 언어/기호가 우리 삶에 더 끼워져야 합니다. (저같은 연구자도 그래서 더 필요합니다!!! 계속 연구하고 책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22. 이번 사건에서 그나마 좋았던 것은 두 선수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 대면 소통으로 말을 나눈 것입니다. 사과하고, 용서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회복을 돕는 일에 대면으로 의미협상을 시도하는 건 여전히 유용합니다. 말투, 시선, 표정, 동작, 옷차림뿐만 아니라 화제를 개시하고 전환하고 의미를 함께 협상할 수 있는 균형적인 대면 대화는 진심으로 사과할 것을 사과할 수 있는 장르적 장치로 가득합니다. 


23. 사각형의 화면에서나, 말만으로 전달할 때 괜한 오해가 발생하는 건 다중적인 감각으로 보완될 수 있는 기호/공간 자원이 생략되었기 때문입니다. 펜데믹을 지나고 나서도 온라인 의사소통이 자주 선호되곤 하는데 그게 너무나 효율적이라서 오히려 불통이 자주 발생합니다. 1시간 만에 피드가 사라지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이강인 선수가 사과문을 올린 것이 커다란 오해를 다시 불러일으킨 것처럼 말입니다.


24. (인간의 의사소통 문화는 낭비적으로 보이는 의례, 과잉된 정보, 여분의 상호작용으로부터 계승되고 보완되었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zoom과 같은 공간은 대면 소통처럼 즉흥적인 말차례의 교환, 화제 전환, 자기수정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상이나 언어교육 현장에서조차 대면 소통의 레파토리를 폄하하고 온라인으로 연결된 비대면 매체의 효율성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습니다. 그걸 충분히 경계하지 않는다면 교육 현장 안팎에서 수많은/불필요한 사건 사고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25. 아무튼 사건이 멋있게 일단락된 것 같지만 저로서는 여전히 갈등이 깊게 잠재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사한 사건들이 계속 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축구판뿐 아니라 사회 어디서든 손흥민식 품행이 바람직하다고 막내, 학생, 청년, 알바생, 신참, 후배, 며느리 등을 가르치려고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앙팡 테리블’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이니까요. 엠지(MZ) 정체성의 출현은 코미디 방송에서 웃고 말 문제가 아닙니다.


26. 갈등하면서도 공존하는 애매한 상태를 불편하게만 볼 것도 없습니다. 무덤이 아니라면 각자만의 권력을 지향하는 욕망이 중단될 수 없습니다. 특히 자기실현만큼이나 타인의 시선을 품고 운동을 하는 세계적인 선수들끼리는 더 그렇겠죠. 그들에게 무조건 친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순진한 발상입니다. 손흥민과 이강인 선수가 친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경쟁하면서도 공적 예의를 지키고 개인으로서 분발하면서도 팀원으로서 양보하고 협력할 수 있습니다. 미움과 사랑의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논점에 대해선 추후에 다시 포스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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