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희진 대표와 언어기호의 정치학
뉴진스의 도쿄돔 공연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 노래와 춤, 표정과 동작, 의상과 무대 배치 등 공연장에서 보이고 들린 언어기호의 위력은 대단했다. 어디서나 호평 일색이며 한·일 양국을 가로막은 이념의 장벽마저 허물 기세다. 언어와 기호가 새롭게 선택되면서 감정이 치유되고 일상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지배적인 문화 풍조도 흔들 수 있다. “말만 번지르르하다.” “치장만으론 아무 의미가 없어.” 그런 비아냥도 넘치지만 언어기호는 구태의연한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창조적 자원임이 분명하다.
뉴진스의 공연을 지휘한 민희진 대표의 기발함에 박수를 보낸다. 지난봄 그는 경영권 분쟁에 얽히고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품이 넓은 줄무늬 티셔츠에 파란색 야구모자를 눌러 쓰고선 “개저씨”들에게 “맞다이로 들어오라”며 얼굴을 붉혔다. 입사 면접처럼 ‘기자회견’도 관례가 된 장르다. 그런데 민 대표의 기자회견은 당연히 나와야 하는 말과 기호의 장르적 장치를 따르지 않았다. 기자회견은 비속어나 욕설이 나오는 장르가 아니다. 억척스럽게 일만 하는 여성·제작자가 남성·경영자와 대립하는 서사가 들릴 곳이 아니다.
민 대표는 자신의 해임안이 법원에서 보류되자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이번엔 단정하게 묶은 머리에 노란색 카디건을 입고 “모두를 위한 챕터”로 넘어갈 때라며 화해의 언어를 선택한다. 언어기호는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스타일이다. 민 대표는 과격하다가 온건한 말로, 헐렁한 티셔츠에서 단정한 카디건으로, 일관적이지만 않은 존재 방식으로 자신의 스타일에 변화를 준다.
‘뭐가 민 대표의 진짜 정체성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장르의 관례를 위반하든, 본인만의 스타일을 모순적으로 충돌시키든, 말과 기호를 요령껏 배열하여 권력질서를 효과적으로 재구성했으니 말이다. K콘텐츠 제작자로 익숙하게 소비되던 의미체계의 바깥을 탐색해온 민 대표는 걸그룹의 브랜딩뿐 아니라 우리 삶의 서사도 언어기호로 변조될 수 있음을 직관적으로 숙지했을 터이다.
분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도 각자에게 허락된 텍스트 자원을 민 대표처럼 편집하고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계략과 왕따로 꼼짝도 하지 못할 때, 오해와 불통이 만연하거나, 기성 정치인의 말이 지긋지긋할 때도,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로 다른 언어기호가 기발하게 선택되어야 한다. 대자보에 호소문을 써보거나, 평서문을 줄이고 감탄문과 의문문을 보태거나, 무시받던 말투를 일부러 사용하거나, 시로 들려주거나, 그림이나 춤으로 보여주거나, 파마나 삭발을 하거나, 복근을 만들거나, 묵혀둔 빨간색 원피스를 꺼내 입는 것이다. 그걸 내 일상 한쪽에 창조적으로 배치할 때 내 삶의 양식이 달라지고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은 새롭고도 유연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정치는 권력을 획득하고 협상하는 행위다. 언어기호는 자유를 선언하고 사랑을 회복시킬 정치적 자원이다. 경영권 분쟁이나 도쿄돔의 공연을 감당하는 규모는 아니라도 위계와 경계를 조장하는 권위주의 통치로 고통받고 있다면, 비판도 대안도 없고 부조리한 관례가 일터를 지배한다면, 언어기호의 정치학이 동원될 때다. 언어기호만 다르게 선택되어도 당연하게 구성되던 권력 장치에 틈이 날 수 있다.
언어기호의 정치학이 각자 주머니나 채우는 낭만적인 자기계발 논리로 폄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여러 의미축에서 창발적으로 구성된 복잡계로 봐야 한다. 언어기호로 연마되는 성장과 변화는 깎아내리면서 거창한 안목으로 사회제도부터 바꿔야 한다는 논리는 일방적이고도 일면적일 뿐이다. 언어기호에 관한 감수성이 우리 모두에게 비판적으로 장착되는 만큼 기득권력의 오지랖은 저지될 수 있다. 권력은 그렇게도 균열되고 협상되는 것이다.
출처: 경향신문 2024년 7월 17일 칼럼. https://www.khan.co.kr/opinion/contribution/article/202407172037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