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정말 괜찮은 건가?
(1)
어제 복잡한 지하철을 탔다. 겨우 서 있을 만한 공간에서 청년들이 한손으로 핸드폰을 유려하게 움켜쥐고선 화면만 쳐다본다. 보는 내용이 특별한 것 같진 않다. 그보다는 그토록 촘촘한 공간에서 자신의 소유물 하나 꽉 움켜진 배치(emplacement)의 형식성이 돋보였다. 조각상처럼 보이는 그들이 얼어 붙은 자세로 말을 건넨다. '나 괜찮아. 나 지금 뭔가에 전념하고 있어. 그러니 나 건들지 마..'
그대, 정말 괜찮은 건가?
(2)
'인류세, 생태언어학, 담론연구, 비판적 언어감수성'에 관한 해외 문헌을 읽다가 멍 때리고 있다. 내가 지향하는 연구활동은 이런 것이지만.. 몰지성이 부끄럽지도 않다는 삶의 현장에서 정교한 학술 문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3)
쌀쌀한 날씨인 줄 모르고 여름 차림으로 강아지와 산책 나갔다가 다음날 몸살 걸릴 뻔 했다. 서둘러 후드티를 여럿 꺼낸다. 이제 가을 내내 후드티와 청바지만 입고 다니겠지..
대학원 다닐 때 좋아하는 교수님들이 후드티에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렇게 입고 강의하고 일하는 모습이 근사했다. 책상엔 런치박스와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이 쌓여 있었고 교수님은 모니터만 한참 바라본다. 그러다가 다소 어벙한 표정으로 그렇지만 치밀한 논점으로 얘기를 이어간다. 난 그런게 너무 멋있게 보여서 학교에 남았을 지도 모른다.
후드티가 여럿 있다. 파란색 후드티에 파란색 시카고컵스 모자를 써보니 통 어울리지 않는다. 이번엔 검은색 후드티에 검은색 화이트삭스 모자를 썼는데 그것도 별로.. 선수처럼 보이면 좋겠지만 이젠 감독님, 아니 단장님으로 보인다.
'아 미국에서 후드티 좀 사올 걸...'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이가 들어가며 그저 후드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기객관화가 생긴다.
외모는 선수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리서처로는 평생 선수로 살 계획이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에서도 고백했지만 조동일 선생님의 "학자는 저술로만 말한다"라는 아포리즘을 여전히 사랑한다. 음험하게 협잡하지 않고 지킬 자리를 지키고, 감당할 것을 감당하는 리서처나 작가들 모두 사랑한다.
(4)
이렇게 말하고나서는 후드티 유니폼 입고 리서치 텍스트를 붙들어야 하는데.. 학술지 원고 마감이 연기되었다는 연락을 받고서도 원고를 쳐다 보기가 싫다. 아마도 일주일 내내 놀면서 별별 책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 것 같다. 책을 올해만 100권 넘게 구매했다. 연구실에서 가져온 책까지 포함하면 사방이 책이다.
49인치 모니터가 빨리 온전하게 작동하면 좋겠다. 엣지가 절절 넘친다.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주문한 걸로 해결이 될 것 같은데 감사하게도 배송만 일주일 넘게 걸린다고 한다.. 마감을 맞출 수 없다는 좋은 핑계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