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수정 및 편집 과정을 거쳐 2024년 2월에 출간된 다음 단행본 원고에 포함되었습니다: '버티는 힘, 언어의 힘' (신동일 저, 서울: 필로소픽)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228266
늘 불편하거나 두려운 장면이 있어요. 힘센 집단이 개인을 곤궁에 빠뜨리는 장면이죠. 화난 채 혹은 낄낄대며, 누군가를 아프게 합니다. 수군대며 왕따를 시킵니다. 몸을 혹사시키고 기회에서 배제시킵니다. 난 큰 집단이 개인에게 겁주는 곳이 늘 싫었어요. 그런 사회는 개인들이 집단 속에서 존재적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그곳은 공리적 이익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간섭합니다. 자유를 통제하며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소름까지 돋으며 고통스럽게 읽었죠. 과학, 사랑, 행복, 언어, 그리고 자유를 왜곡하고 서로 다른 개인을 무력하게 위축시키는 집단의 광기를 끔찍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언어의 생성과 죽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말과 글을 통제하며 다양한 삶의 형태와 사회적 의사소통체계를 억압하는 과정에 호기심을 갖는 연구자라면 이 작품은 빼놓을 수 없는 클래식 중 하나입니다.
소설 ‘1984’에서 당(국가)은 ‘개인됨’을 허락하지 않으며, ‘새로운 언어’(New Speak)위원회는 사회구성원이 사용하는 언어까지 간섭하며 심지어 외국어 공부조차 통제하죠. 당은 “누구든 외국인들과 접촉하면 그들도 자신과 비슷한 인간이고, 그들에 대해 들어온 이야기 대부분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결과 그가 살고 있는 폐쇄된 사회가 붕괴되고 사기의 밑바탕이 되었던 공포, 증오, 독선이 고갈되어 버리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말과 글을 보고 듣고 배우고 섞으면 다른 앎과 삶의 방식에 서로 노출됩니다. 그렇게 되면 독선적인 집단성이 유지되기 어렵죠. 개인들은 그때부터 자유를 소망하게 될지 모르죠.
우리의 언어사회는 어떤가요? 이곳은 어떤 언어든 자유롭게 사용하고, 차이와 다양성이 존중되는 곳 아니었던가요? 사무실, 식당, 회의장에서 내 언어를 침묵시키거나, 혹은 위선적인 말과 글로 살아가다 잠자리에 들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는 ‘1984’의 윈스턴이 우리 중에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요?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있을 때 텔레스크린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고백이 북한 사회에서나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거대 여당인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고 칼럼을 쓴 교수와 그걸 실은 해당 신문사를 고발한 여당의 기세등등함을 보니 내가 뭘 잘못 생각했는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언어는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는 언어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힘이 센 어디선가 언어를 만드는 누군가를 손본다고 알려지면 개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누구든 위축되죠. 내 위에 군림하는 부적절함에 대해 저항심을 갖기도 부담스럽습니다. 불편하고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것도 망설여집니다. 윈스턴의 심문자인 오브라이언이 말했습니다.
“개인은 유한하나 국가는 불멸”이라고.
그가 말한 국가는 사랑도, 미술도, 문학도 사라지고,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도 없어지는 곳이며, 권력을 향한 도취감, 승리감의 전율, 무력한 적을 짓밟는 쾌감을 얻으며 살아가는 전체주의 사회였습니다. 이 나라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죠. 그래도 민주당이 여당일 때 고작 신문 칼럼을 쓴 학자를 검찰에 고발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끼게 됩니다.
정치담화에 재갈을 물린 곳에선 무엇이 허락될까요? 윈스턴이 관찰한 ‘1984’의 그곳은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 맥주, 축구, 도박, 엉뚱한 곳을 겨냥하여 투정을 부리는 것”이 넘칩니다. 그곳은 결코 좋은 언어사회가 아닙니다. 그곳은 온전한 자유가 허락된 곳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