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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세 작가의 도전 "밥 담듯 계속 그리고 싶어요"

복합암 이겨낸 이명희씨 첫 개인전, 서산해미아트갤러리에서 오는 29일까지

"저는 그림을 배워본 적 없지만, 기본적인 색을 바탕으로 생각해보고 저만의 색을 가미해서 그리고 있어요. 죽음 앞에서 나를 구해준 것이 그림이니까 앞으로도 밥 담듯 계속 그려야죠."


붓을 쥐고 캔버스라는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것은 일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한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나의 얼굴, 나의 가족, 평생 살아 온 공간과 기억을 새롭게 회상하고 재현하는 일.


일흔여덟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명희 작가의 첫번째 개인전 '나의 이야기'가 충남 서산시 해미아트갤러리에서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지난 1일 오후 해미아트갤러리에서 이명희 작가를 만났다.


이명희.jpg 일흔 여덟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명희 작가의 첫번째 개인전 '나의 이야기'가 충남 서산시 해미아트갤러리에서 지난 10월 1일부터 29일까지 열린다. ⓒ 김현석


#1. 말기암 판정, 그림과의 만남


2023년 6월 갑작스럽게 찾아온 말기암 선고. 췌장암, 간암, 요관암까지 발견된 복합암 말기였다. 이명희 작가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다.


"몸이 좋지 않아 검진을 받았는데 3가지 암이 발견됐어요. 병원에서는 수술도 어렵고 길어야 6개월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좌절 속에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결정했다. 1년 6개월 동안 27회의 항암 치료를 견뎌야 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미술 수업은 그의 삶과 희망을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치료와 요양으로 시간을 보내던 중에 병원에서 진행하는 미술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그러다 문득 나만의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리든지 그저 따라 그리는 게 아니라 내가 나름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가 생겼어요."


#2. 첫 작품 <세잔의 사과>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그의 인생에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가족들은 적극적으로 그의 의욕을 북돋았고 남편은 그를 위한 책상이 있는 작업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그가 첫 작품으로 선택한 것은 사과. 바로 그 유명한 <세잔의 사과>였다.


"참 오랜시간 정성스럽게 그린 그림이에요. 나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선생님이 내가 잘 그린다고 하더라고요."


이어서 그린 작품은 <새콤한 사과>. 그는 "세잔의 사과와는 다르지만 내가 그린 사과는 더 싱싱하고 새콤해 보여요"라며 웃어보였다.


세잔의 사과, 24×34cm 종이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2024.jpg 세잔의 사과, 24×34cm 종이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2024 ⓒ 이명희
새콤한 사과, 26×34cm 종이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2024.jpg 새콤한 사과, 26×34cm 종이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2024 ⓒ 이명희


#3. 그림 권한 사람들... <일출>과 <일몰>, 그리고 <귀가>


처음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6개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명희 작가는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제 스스로 다짐했어요. '죽는 건 말이 안돼. 끝까지 치료 받으면서 교수님이 오지 말라고 할 때까지 끈질기게 치료 받을거야'라고요."


자녀들과 남편, 의사 선생님들도 그의 작업을 독려하고 지원했다. 가족들은 그림의 소재가 될만한 사진을 보내왔고, 남편과 의사 선생님은 그의 작업을 보고 '조금 더 어둡게 그려보라', '사람을 그려보라' 등등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일출>과 <황홀한 일몰>이다.


일출.png 일출, 36×26cm 종이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2025 ⓒ 이명희
황홀한 일몰.png 황홀한 일몰, 36×26cm 종이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2025 ⓒ 이명희관련사진

특히 배우자 성기봉씨(80)는 이명희 작가가 그린 작품의 가장 솔직한 평가자이자 디렉터였다. 작품 <귀가>는 처음에는 집과 주변 자연만 그려진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림을 본 남편이 "집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으니 온기가 없고 사람 사는 집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는 것. 이 작가는 "집으로 가는 길과 사람을 그려보라고 조언하더군요. 그렇게 남편의 의견을 수용해서 완성된 작품이에요"라고 전했다.


귀가.png 귀가, 36×24cm 종이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2025 ⓒ 이명희


#4. 본 적 없고, 가본 적 없는 곳... <올리브 나무>와 <코끼리바위>


"그림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같아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채우고 싶은 색을 선택하는 거요."


자화상, 사과, 화초, 일출과 일몰. 이명희 작가가 그린 작품의 경로다. 자신의 얼굴과 세잔의 사과, 직접 키운 화초와 사는 곳의 일출과 일몰을 그린 후 새롭게 그리기 시작한 것은 한번도 본 적 없고, 가본 적 없는 대상이다.


올리브나무.png 한번도 보지 못한 올리브 나무, 24×34cm 종이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2024 ⓒ 이명희


작품 <올리브 나무>는 병원에 있었던 인쇄물이 그의 눈에 들어와 새롭게 태어났다.


"처음에는 무슨 나무인지도 몰랐어요. '비파'일까 추정만 했죠. 나중에 딸이 찾아보니 올리브 나무더군요."


또 다른 작품 <코끼리바위>도 가본 적 없던 곳을 나름의 상상과 색감을 더해 그려진 작품이다.


"남편 말로는 오래 전에 코끼리 바위 근처에서 낚시도 하고 산책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저는 기억에 전혀 없어요. 어쩌면 기억의 저편에 있는 어떤 것이 그림이 되는 걸까하고 생각해요."


코끼리바위.png 코끼리바위, 36×48cm 종이에 색연필, 오일파스텔, 2025 ⓒ 이명희


#5. 밥 담듯 계속 그리고 싶은 그림


그림은 이명희 작가에게 삶에 대한 희망과 가족들, 그리고 주변의 사랑을 돌아보는 계기였다. 삶을 돌아보고, 가족과 함께 했던 공간을 기억해보고,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느끼는 일이였다.


요즘 그는 호랑이 그림을 그린다. 끼니마다 밥도 차려주고, 세심히 돌봐주는 남편과 가족들 덕분이다. 앞으로도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려나갈 계획이다.


"평생 가족들 밥그릇에 소복이 눌러 담아온 밥처럼 꽃을 담아 그리고 싶어요. 그렇게 계속해서 밥을 담듯 그림 그리고 싶습니다."


바위와 바다.jpg 인터뷰 말미에 기념 사진을 남기고 싶은 한 가지 작품을 선택해달라는 질문에 이명희 작가와 배우자 성기봉씨는 <바위와 바다> 앞에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했다. ⓒ 김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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