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아버지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한 순간'을 들여다보다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프랑스 불법체류자 ‘파힘’이
우여곡절 끝에 12세 미만 부문 프랑스 체스 챔피언이 되면서
추방 직전의 아버지를 구하고 모국에 살던 가족들도 데려와 모두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파힘 모하마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종의 ‘천재 소년 이야기’인데,
파힘은 모차르트류의 압도적인 천재라기보다는
부단히 노력했던 대단히 영리한 꼬마 정도로 보인다.
아니, 그도 천재인 건 맞는데 체스 시장에 워낙 그런 부류들이 많아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2013년 세계 주니어 챔피언이 된 이후 별다른 수상 기록은 없다.
물론 ‘파힘’만으로 2시간짜리 영화를 끌어갈 수는 없다.
파힘에게는 그를 도와주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는데,
파힘을 통해 친구들은 난민의 비참한 실상에 관해 배우고
선생님은 평생 그를 괴롭히던 패배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된다.
천재 소년 이야기는 흥미롭기는 한데, 보고 난 이후 좀 씁쓸하다.
내 삶과의 괴리감이 느껴지고 내 것으로 끌어와 적용할 부분이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쟨 진짜 똑똑했네. 끝!’ 이런 기분.
사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파힘의 난민 생활 수난기도, 긴장 넘치는 체스 게임도,
그가 챔피언 컵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는 장면도 아니었다.
딱 한 장면, 파힘과 아버지가 프랑스로 건너온 후 일시적으로 살게 된
난민보호소에서의 평범한 식사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당연히 방글라데시 풍습대로 손만을 이용해서 식사하는데,
프랑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파힘이 갑자기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쥐고는 서툴게 칼질을 시작하는 거다.
마치 도구를 처음 잡아본 인류 최초의 원시인처럼 거칠고 우악스럽게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는 파힘과
그런 아들을 밥 먹다 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버지.
아버지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아, 네가 여기 사람이 되어 가는구나, 하는 데서 오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
아니면, 어떻게 네가 벌써 우리 고유의 풍습을 버리니, 하는 괘씸함?
어쩌면 그는 이제까지 한 번도 아들에게 느껴본 적 없는
어떤 ‘낯섦’을 발견하지는 않았을까.
마치 ‘이방인’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말이다.
하지만 그 이방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방글라데시를 탈출하고,
기차 지붕 위에 올라타 같이 인도 대륙을 가로지르고,
돈이 없어 길 위에서 꼭 안고 자던, 내 분신과도 같은 피붙이이다.
분명 내 피가 흐르고 나와 똑같은 생김새인데 이제 더는 ‘나’라고 부를 수가 없다.
‘나’인 듯 보이고 ‘나’ 같기도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존재는 더이상 내가 아니다.
명백한 ‘타인’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맞닥뜨린 듯한 아버지의 고요한 ‘멈칫’에서,
힌두인 특유의 길고 진한 속눈썹 그림자에 파묻힌 어둡고 흐릿해진 시선에서,
떠나는 아들을 붙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아버지의 절망감과 무력감, 그리고
막막하고도 서늘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는 그 순간, 칠흙같이 검은 우주 시공간에 외따로 남겨진 듯 철저히 ‘혼자’였을 거다.
자신의 문명에 완전히 뿌리 내린 아버지와 그 문명에서 날아오른 아들은
아마 평생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이민자의 가정이라면, 아니 성장하는 아이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낄 법한 거리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얘기하는 건
아직 그들 사이에 ‘사랑’이라는 보물이 남아있기 때문이겠지?
판도라의 상자는 틀렸다.
결국 우리에게 힘을 주는 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뜬금없는 ‘희망’이 아니라,
옆에서 혹은 어딘가에서 날 생각하고 응원해주는 누군가의 ‘사랑’이 아닐까.
영화 <파힘>을 보고 그런 생뚱맞은 생각을 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