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전부가 된다는 것.
중학생 때 엄마가 아빠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힘들어하셨다. 그때 엄마와 이야기하다가 무심히 던진 얘기였다.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하니까!"
나는 엄마가 우리 때문에 어떠한 희생도 하길 바라지 않았다. 엄마를 생각하는 효심 지극한 아이가 아니라 부모님의 부양의무를 피해 가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인생을 책임져줄 수 없으며 엄마 역시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각자가 자신을 돌보며 살아가기도 힘든 삶에서 엄마는 우리를 먼저 챙기셨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가면서 주변 사람들도 만나지 못했고, 일하느라 신경 써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사신다. 엄마를 위로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괜찮았다. 오히려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삶을 살지 않길 바랬다. 나중에 결혼한 자식들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단골 멘트인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이래?!"
이런 얘긴 듣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부모님은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습관을 일찍이 길러주셨다. 성인이 되면서 모자란 등록금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도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제적인 독립을 하게 되었다. 자취방을 구할 때도, 결혼을 할 때도 나는 부모님보다 은행을 택했다. 부모님께 어떠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당신들을 위한 삶을 사시길 바랬다. 그래서인지 부모님도 우리가 조금이라도 부담이 될 것 같은 일은 피하신다.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서 행복하길 바라고 있다. 그 행복은 부모도 자식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을 위한 행복이다.
결혼 전까지도 그러한 나의 가정환경이
결혼생활에 큰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결혼 이야기를 처음 꺼냈을 때 우리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걱정은 단 하나였다. 남편이 외동아들이라는 것. 사실 내 주변에는 외동이 없어서 어떠한 기준도 없었고 그저 사람들의 편견이라고 생각했다. 외동이면 모든 관심이 자식에게 향해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봤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며느리라는 존재가 남편과 함께 사는 여자 정도로 생각하는 분은 아니셨다.(왠지 그럴 것 같았다..) 나를 만나기도 전에 마음에 들어하셨고, 어서 아들을 데려가 달라고 하셨다. 생각보다 외동아들이 더 편한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해봤다.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외동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바꿔주고 싶었다. 우리 어머님은 일반적인 시어머니가 아니라, 정말 좋으신 분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나의 시댁 예찬론을 듣고 무슨 종교에 빠진 사람 같다던 엄마가 하신 말씀이 있다.
"너무 좋고, 너무 편한 것도 좋은데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수 있는 것들만 해. 너답지 않아서 체 할 것 같아.."
나는 사람을 쉽게 믿지도 못하고 낯도 많이 가려서 알아가는 시간이 꽤 걸린다. 내가 안 지 얼마 안 된 시댁에 대해 너무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해서 엄마는 걱정했다.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아들에게 기대하고, 바라보는 부담스러운 시어머니가 아니면 됐다. 어머님은 주변에 사람도 많고 여러 활동 들을 하셨다. 언제나 사람들에 둘러싸여 여행도 다니시고, 시간을 보내셨기에 아들을 장가보낸 그 헛헛함보단 후련함이 더 크단 이야기를 나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가끔 하시는 아들 자랑도 재미있었고 호응도 잘했다. 나는 바라기 전에 알아서 잘하는 센스 있는 며느리가 되려고 애를 썼다. 어머님은 그런 나를 이뻐해 주셨고 자랑스러워하셨다. 친정엄마 생신 때는 뵙지 못해도 어머님 생신에는 둘만의 데이트도 하고 단둘이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운 사람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애써 쌓아 온 어머니의 신뢰관계를 나는 지키고 싶었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고, 그 고비를 넘는 건 큰 숙제였다. 조리 때 어머니와 긴 시간을 보내면서 남편의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다. 가끔 듣는 것과 매일같이 듣는 건 느낌이 살짝 다르긴 하다. 어머님이 남편 얘길 하실 때 점점 딴생각을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갑자기 어머님이 눈물을 보이셨다. 키우면서 잘해준 게 없고, 신경을 써주지 못했는데 반듯하게 자라준 것이 고맙고도 미안하다고 하신다.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넘쳐흐르게 애지중지 키우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게 키우신 게 눈물을 보이실만큼의 소홀함이라면 우리 엄마는 대성통곡을 하고도 남을 일이다.(엄마.. 난 괜찮아요..) 나는 당황스럽고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 입장을 내가 다 알 수는 없는 거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아들 이야기가 나는 어째 부담스러워졌다.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고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한 일화들과 동네에서 유명한 엄마 바라기였다는 얘기 앞에는 항상 결혼 전이라는 전제가 붙었다. 결혼 전에는 엄마를 자주 안아줬다. 결혼 전에는 엄마 옆에서 자려고 귀찮게 했다.. 결혼 전.. 에는....
난 남편이 결혼 전에 어땠는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결혼 전이라 다행이다. 그런데 어머님은 아니신 것 같았다. 그 얘기를 하실 때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렇다고 지금 처자식 있는 아들에게 엄마만 바라보고 매일 가서 안아 드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좀.. 이상한 것 같은데..) 같이 있는 시간이 길다 보면 예민하게 들릴 수 있다는 생각에 나의 삐뚤어진 마음을 다잡아 보려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골적으로 아들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신 적 없던 어머니는 기어코 나에게 그 말씀을 하셨다. 남편과 같이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을 때 어머님의 차가운 말투와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정운이 밥은 누가 챙겨주니?
너는 네 새끼 챙겨라 난 내 새끼 챙기련다"
단 이틀이었다. 주말만이라도 댁에 다녀오셨으면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알아도 모른척하고,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고 나는 갈길을 잃었다.
남편은 어머님의 전부였다.
그 전부인 아들과 내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4년 가까운 시간 동안은 몰랐다, 아니 모르고 싶었다. 어머님은 집을 떠나실 때 남편과 탯줄이 아직도 연결이 된 것 같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남기셨다. 그래도 결혼을 했으니 너희 끼리 잘살면 된다고 하시고는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댁으로 가셨다. 어머님이 가시고 나서 내 머릿속에는 탯줄이 맴돌았고, 여전히 이어졌다고 생각하셨다는 어머님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정도면 장가를 안 보내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래도 육아는 해야 했고 온전히 우리만 남았다.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가져보는 우리만의 시간이 행복했다. 거실에서 마음껏 유축도 했고, 눈치 보느라 먹지 못했던 군것질도 원 없이 했다. 몸이 아프고 피곤해도 마음이 편하니 아픈 줄도 몰랐고 아이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아마 그러한 불편한 시간이 없었더라면 전혀 몰랐을 감정들이다. 그만큼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조리 때의 일들은 잊으려고 노력했다.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풀어야 할 일들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다신 찾지 않을 것 처럼 떠나셨던 어머님은 계속해서 남편에게 연락을 하셨고, 반찬 같은 것들을 남편에게 보내셨다. 신경이 쓰였지만 서로에게 충분한 시간과 거리가 필요했기에 모른척했다. 가시기 전에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쉬시고 다시 뵙자고 했을 때도 뿌리치셨기 때문에 어머님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처음으로 혼자 아이를 보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뒤 집 정리를 하려던 차에 시댁 단톡 방에 문자가 하나 와있었다.
"뿅뿅아(아기이름) 할머니 할아버지 지금 간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긴 알겠는데 그 의미가 아니길 바랬다. 이어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님께서 조리가 덜 끝났으니 더 지내다 오라고 하셨다고 한다. 조리는 내가 받는데 정작 내 의견은 아무도 묻지를 않는다. 몇 분 후 비번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아이가 깰 까 봐 조용히 들어오려고 하셨다고 한다. 아이만 안 깨면 그 집에서 있는 며느리는 뭘 하고 있는지 크게 중요하지 않으셨다. 얼핏 보면 나를 끔찍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디에도 며느리에 대한 배려는 없다. 어머님이 며칠 더 지내고 가셨을 때 나는 직감했다. 남편에서 아이로 전부가 바뀌었다는 것을...
손주가 시부모님의 전부가 된다는 것
친정과 시댁 모두 첫 손주기 때문에 그 사랑을 나는 가늠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한다. 얼마나 이쁘실까, 얼마나 보고 싶으실까. 다만 다른 게 있다면 그 마음을 누구에게 어떻게 표현하느냐다. 그전에 있던 일들은 정말 내가 예민해서 일수도 있고,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른 문제들이기에 애써 묻어두려 했다. 어머님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댁에 가신 다음날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바로 다음날부터 수유에 관해 물으셨을 때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 달간은 모유수유를 했는지, 예방접종은 했는지, 이유식 책은 사둔 건지, 밥은 먹었는지, 잘 노는지, 잘 자는지, 지금 아기는 무엇을 하는지.. 꼬박꼬박 대답하고 답장을 드리다가 궁금함이 점점 디테일 해지고, 늘어나니 조금씩 지쳐갔다. 핸드폰만 봐도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꾸역꾸역 잘 참아오다가 아이가 보고 싶을 때 갑자기 오시는 방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늘 줄게 있으셨고, 두 분이 시간 되실 때 오셨다. 나는 그 줄 것을 받고 싶지 않았고 혼자 있고 싶었다. 아이가 보고 싶으시다기에 사진도 수 없이 보내고, 전화로 모든 걸 알려드렸어도 결국엔 보셔야 끝이다. 오시면 아이도 봐주시고 나는 조금 쉴 수도 있으니 감사해야.. 하는데 나에겐 그런 도움이 필요하지가 않았다. 힘들 때 아이를 봐주시겠다는 친정엄마가 계셨고, 아이를 보는 시간이 좋았다. 단순히 방문이 싫었다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며느리에 대한 배려를 느끼지 못하니 자꾸 피하고만 싶었다. 언제 방문할지 모르는 시부모님 덕에 나는 우리 집 같지 않은 불편함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되도록이면 약속을 정하고 오시게 하겠다고 했지만 내가 혼자 있을 때 이미 출발하고 있다는 전화에 우리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느 순간 진동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댔고, 카톡에 숫자만 떠도 긴장이 됐다. 처음에는 내가 어머님과 껄끄러운 일들이 마음에 남아서 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의 전부가 손주 같다는 생각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어머님은 전화가 올 때마다 아버님 이야기를 전하셨다.
"아버지가 아기 보고 싶다고 상상병이 걸리셨어. 네가 한번 오라고 문자라도 해줘라"
"아버지가 일어나면서 애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신단다, 식사하실 때도 사진 보면서 먹는 거 있지 "
"아랫집은 우리 집에 애가 사는 줄 알아, 하도 아기 이름을 부르면서 얘길 하셔 가지고"
"아버지가 쉬는 날에 가자신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시네"
행복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과 전부가 되는 것은 무게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변하게 한다. 나는 조금만 내버려 두면 알아서 시댁도 갔고, 연락도 했으며, 아마 먼저 놀러 오시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나의 노력은 시댁의 손주사랑에 턱없이 부족했다. 한동안 그런 연락은 계속됐고 나는 점점 전의를 상실했다. 자주 연락드린다고 생각했고, 자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얼마큼, 언제까지를 알 수 없으니 끝이 없는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불안했다. 그 와중에 내가 혹시나 자다 깰까 전화 대신 문자를 보내는 친정엄마나, 한번 오시라고 해도 사위가 퇴근하고 못 쉬는데 가도 되냐는 친정아빠의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힘이 빠진다.
누군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지켜보는 느낌은 시댁이 아니라 친정이라 해도 부담이다. 집에 남편 친구가 집에 놀러 왔을 때도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님은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애가 사람 손타서 아픈 건 아니냐고 하시는데 이런 걱정을 하실 거라면 명절에 온 친척이 모였을 때 오지 말라고 하셔야 했다. 이제는 남편의 전화 소리만 울려도 나는 불안했다.
'혹시 오라고 하시는 건가?, 온다고 하시는 건가?, 영상 통화하자는 건가?, 아이 맡기라고 하시는 건가?'
이게 바로 학교에서 배웠던 *고전적 조건 형성이던가.. 전화나 문자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가 시댁의 연락 후에 오는 남편과의 다툼과 아이에 대한 과한 관심이 결국에는 모든 전화나 문자에도 나는 자극이 되었다. 시댁에 다녀오거나 뵙고 나서 한동안 잠을 잘 수도 없고, 먹지도 못했다. 명절에는 처음 맞는 명절, 처음 맞는 어린이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라고 어떤 날이든 의미를 부여하셨고 보고 싶어 하셨다. 남편과 시부모님과 함께 있다 보면 이토록 격렬하게 시댁의 표현을 불편해하는 내가 비정상 같은 사람이 되곤 한다. 주변을 바꿀 수는 없고 나하나 바뀌는 게 제일 간단하니, 모든 문제를 나의 가정환경 탓을 해본다.
'우리 부모님이 저렇게 표현을 안 하셔서 내가 적응을 못하는 건가? '
'다른 집들도 다 이렇게들 사는데 나 혼자 이렇게 적응을 못하는 건가?'
'내가 독립적인 게 아니라 개인적이었던 건가?'
남편이 우리 친정에게 이러한 감정을 느꼈다면 주저함 없이 남편을 지키고 보호해줬을 것이다. 왜냐면 친정이라도 그런 부담은 피하고 싶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나에겐 가정이 먼저고 남편이 먼저다. 남편도 그래 주길 바랬고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남편과 다른 의견 차이로 심해지는 갈등에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롯이 나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시댁에 죄송한 마음이 사라졌고 가정환경이고 뭐고 나 자신을 자책하지 않기로 한다.
부부간에 서로가 전부라고 하면 아름답다. 부담이 아니라 신뢰고 그 정도는 돼야 남은 인생을 걸만하다. 지금 나에겐 아이가 전부다. 아이도 지금은 엄마가 전부지만 언젠가는 당연히 바뀔 것이다. 나 역시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식만 바라보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자식이 마흔이 가까워도 전부라면 장가를 보내지 말아야 한다. 남편도 부모님이 전부라고 했다면 난 언제든 시부모님 품으로 돌려보낼 참이었다. 눈치를 뒤늦게 챙긴 남편은 나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힘들다는 문제들을 해결해주려 애썼다.
시부모님께 정말 말도 안 되는 걸
바라고 있는 걸까?
시부모님이 오시는 대신 남편이 시댁에 자주 들렸다. 시댁에 다녀와서
'엄마 아빠가 아이 보고 싶다고 맨날 동영상 보시면서 식사하신대, 나중에 전재산은 손주한테 주실 거래..'
농담을 건네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단 한 푼의 재산도 바라지 않고 어떠한 지원도 사양하고 싶다. 이뻐하시는 그 마음을 나는 몰랐으면 한다. 친정부모님이 손주가 얼마나 보고 싶고 이뻐하시는지 나에게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나 또한 남편에게 전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인데 굳이 그렇게나 불편하다는데 꼭 알려야 하는 건가? 왜 이리 병적으로 시댁의 관심이 부담스럽고 불편한 건지 나를 제외한 주변 모든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친구가 나에게
"나는 시댁에 애 낳으려고 결혼 한 사람 같아. 무슨 대리모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너 애 낳으면 네 자식이 아니라 모두의 자식이 될 거야..."
아이 낳기 전과 다른 시댁의 온도차를 조금은 극단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러한 서글픔들이 남일이라 자신했는데 나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며느리였다. 나는 조금 특별할 줄 알았고, 우리 시댁은 그래도 다를 줄 알았다. 우리 시부모님이 유별난 것도 아니고, 나의 가정환경에 이상도 아닌 나의 무모한 기대가 문제의 원인이었다.
시부모님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뭐라고 며느리 나부랭이가 싫어한다고 달라질까. 여전히 시댁에는 남편이 보낸 아이 사진이 집안 전체에 도배가 됐고 어머님 지인분들에게 얻어오신 옷이나 신발을 보내신다. 수시로 나를 위해 아이를 돌봐주시겠단 연락이 오고 있으며 새해 소원도, 생신 소원도 손주의 건강과 행복이다. 시댁에 들어서자마자 두 팔 벌려 아이부터 안으시고, 헤어질 때는 또 언제 올 건지, 다음 주에 볼 건지 나를 제외한 약속이 정해지지만 나와 정한 약속은 아니기에 지키진 않는다. 중간이 있다면 나는 최대한 거기에 맞춰보려 한다. 시부모님도 중간을 향하고 계신지는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니들끼리 잘 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단다.."
우리끼리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내가 바라는 것도 그거다. 부모님들끼리 즐겁고 행복하게 사시는 것, 자식이나 손주는 행복의 일부라는 것. 조금씩 서로를 배려하면서 언젠가 어느 중간지점에서 만난다면 진심으로 말씀드리고 싶다.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고전적 조건 형성*
Watson&Rayner(1920)는 알버트라는 아이가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도록 하였다. 이 아이는 본래 흰쥐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던 아이였다. 하지만 알버트가 흰쥐에게 다가가거나 만질 때마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를 들려주었고, 결국 알버트는 흰 쥐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출처_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