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과 시가의 불편한 당연함들
내가 시가 제사를 가지 않기로 한건 작년부터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을 먹었던 건 물론 아니다. 나도 여느 며느리들처럼 남편의 조부모님 제사를 달력에 저장하고 일찌감치 가서 상차림에 손을 보탰다. 그렇게 잘 해오다가 작년 여름쯤 제사가 돌아왔을 때, 퇴근길에 남편만 시댁에 들려서 제사를 지내고 왔다. 나는 당연스럽게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오늘 못가봬서 죄송해요. 음식 하느라 많이 힘드셨죠?"
"아니다. 다들 바쁜데 어쩌겠니"
대화 내용은 특별한 문제가 없었는데 나는 대화 내내 죄송 병이 걸린 사람처럼 연신 죄송해했다. 어느 순간 시댁 제사를 거드는 게 나의 역할이며, 의무가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정에도 제사가 있고 일 년에 단 한번이지만 남편은 날짜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송할 이유도 없다. 언제부터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도 당연한 도리며 책임이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혼 전부터 소리 없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결혼하기 전 명절 때의 일이다. 천천히 오라고 하셨지만 나름 일찍 갔음에도 내가 오기 전에 벌써 이것저것 만들어놨다는 말씀에 멈칫했다. 평범한 그 명절 분위기가 나는 당황스러웠다. 남편은 결혼 전에 자신의 집은 음식을 사서 간소하게 제사를 지낸다며 가서 밥이나 먹고 오는 거라고 했는데.. 남편의 말과는 달리 사 온 음식이라고는 과일밖에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음식을 두 분이 하고 계셨다. 남편과 당장 진실의 방에서 길고 긴 독대를 나누고 싶었다.
남편의 구구절절한 변명을 듣고 더욱 황당한 사실은 매번 상이 차려진 후에 작은집에 왔기 때문에 그 음식들을 만든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제사 음식을 한 번도 도와준 적이 없다는 건가???? 본 적도 없다고?? 그저 얼씨구나 먹기만 했다고??'
여자들만 당연히 일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여자라는 사실에 작은 동산 뒤에 더 큰 산을 넘어야 하는 아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가 강 씨 집안의 제사를 강 씨들만 참여하지 않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준비할 때는 보이지도 않다가 상이 차려지면 어디선가 멀끔히 차려입고 나타나서 차례를 지내고 여성들은 밀가루와 고춧가루가 덕지덕지 묻은 차림으로 빠져있는다. 시댁의 명절 포함 제사문화가 굉장히 떨떠름했다. 아마도 어떠한 역할의 구분 없이 진짜로 간소하게 제사를 지내는 친정 분위기 때문에 나에게는 큰 문화충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고분고분 시댁 문화에 흡수되기엔 나는 약아빠진 며느리였다.
그 후로 명절에는 아침 일찍 시어머니가 같은 동네에 사시는 작은어머니 댁에 가실 때 남편을 깨워서 데려갔다. 작은어머니와 시어머니는 남편의 이른 방문을 굉장히 어색해하셨다.
"너는 뭘 할 줄 안다고 벌써와.. 이따 다 되면 천천히 오지.."
할 줄 아는 건 나도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도 천천히 오라고 하셨는데 진짜 그래도 되는 건지도 분간을 못하던 터라 남편을 멱살 캐리 해서 굳이 끌고 갔다.
'사온 줄만 알았던 음식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똑똑히 보아라!!'
나라고 처음부터 잘해서 자연스럽게 어머님과 음식 하는 건 아니었다. 등 떠민 누군가는 없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내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 자리에 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의 집안 분위기에 맞추어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좋아서 따른다기보다는 이미 당연하게 행해지던 모든 것들을 나 홀로 반기를 들어 내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꿀 용기가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시가의 불편한 당연함들이 제사뿐일까?
결혼 후 5년이 지났을 무렵, 제사를 시작으로 사위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것들 중 며느리에게는 당연히 짊어지는 의무에 점차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꺼끌꺼끌한 모래 알갱이가 양말 안에서 굴러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금이야 옥이야 소중히 키워온 꽃 같은 딸도 아니고 남동생을 쥐어패면서 권력을 휘두른 잡초 같은 딸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많이 아끼시지만 표현은 많이 서투시고 그런 환경탓에 서툰 표현들이 익숙하다. 나를 유난스럽게 챙기거나 걱정하시는 편도 아니라서 웬만한 건 그냥 넘어갈 만큼 예민한 편도 아니고, 남녀평등을 목숨 걸고 사수하는 것도 아닌데, 친정과 시댁의 불편한 당연함들이 나를 유별나면서도 돌연변이 같은 며느리로 변화시켰다.
명절에 잠깐 들리면 서운해하는 시가
명절에 안 오는 게 당연시되는 친정
어디를 먼저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저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올시다) 시가는 30분 거리, 친정은 3시간 거리라서 시가에 다녀온 뒤 친정에 가는 것이 나는 힘들었다. 시가에서 며칠 동안 이것저것 하며 긴장을 해서인지 집에 오면 그대로 뻗어서 다시 길고 긴 정체를 뚫고 친정에 갈.. 의지가 부족했다. 친정에서는 짧은 연휴를 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보낸다며 오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게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제사는 물론이고, 명절 때도 친정을 가지 않는 게 어느 순간 당연시되었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서운한 건 아니었다. 다들 상황에 맞춰 그렇게 지내다 보면 시댁에 못 갈 일이 생겨도 이렇게 넘어갈 줄 알았다.
작년 명절에 코로나가 들끓는 와중에 시가에서는 오지 말란 이야기가 없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심 온 친척들이 다 모인 시가에 가려니 걱정이 들긴 했다. 그 와중에 친정은 어차피 못 올걸 알지만 먼저 오지 말라고 전화를 주셨다. 막상 가니 생각보다 많은 식구들이 모였다. 평소대로 라면 전날 가서 음식 하는 것도 도왔을 텐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잘 곳도 마땅치 않고 나도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아 당일날 일찍 가서 오후에 돌아왔다. 전보다 일손을 많이 거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시국에 다 함께 얼굴 보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랬다.. 나 혼자만.. 그랬다.
어머님 친구분의 딸이.... 나와 아는 사이라 연락을 주고받던 중..
"명절에 잠깐 왔다 갔다면서?...너무 금방 갔다더라"
맞는 얘기긴 하다. 그런데 어머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줄은 몰랐다. 다른 친척들 다보내고 우리가 마지막에 갔어도 잠깐이었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깝다는 이유로 명절, 제사, 김장, 생신, 아버이 날, 연말... 수시로 함께하는 게 당연시되었다. 어쩌다 그러한 암묵적인 패턴을 한 번이라도 건너뛰게 되면 내가 맑은 물을 흩트려버린 미꾸라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과연 시댁이 먼 지방에 있었어도 친정만큼 못 갔을까? 가끔 안부만 주고받아도 서로가 마음 상하는 일이 없었을까?
출산 후
우는 친정과 웃는 시가
나는 이틀 하고도 12시간 만에 아이를 낳았다. 하루는 가진통이었고 하루는 진진통이었는데 내가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자궁문이 거의 열려있어서 늦게 왔다고 혼이 났다. 진통 주기가 짧아질 때까지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기는 밑으로 내려와 있었지만 남다른 머리 크기 덕에 12시간 동안 엄마와 고생을 했다. 나는 자궁문이 그렇게나 열려도 견딜 만큼 신체적 고통을 매우 잘 참는다. 그런데 병원에서의 12시간은 정말 무통 천국에서 살고 싶을 정도였다. 무통주사는 이미 자궁문이 많이 열린 나에게는 약효가 미미했고 나는 그렇게 왕두 베이비를 만나게 됐다.
저세상 구경을 하고 친정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는 우셨고, 시어머니를 만났을 땐 아이부터 안으셨다. 아마 이건 딸이 없는 시어머니는 모를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지인분과 통화소리가 그렇게나 신경이 쓰였다.
"나 손주 봤어~~ 며느리는 순산했지~"
'순산?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순산? 죽지 않고 살아서 순산? 걸어서 집으로 와서 순산?'
나도 안다. 아이도 산모도 모두 건강하기에 기쁜마음으로 하신 말씀이란 걸.. 근데 낳기 전 그 순간들이 스치면서 나는 그 순산의 소리가 그렇게나 예민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이 낳기 전에 친구들 사이에서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이야기 들이 하나, 둘씩이 내 눈앞에서 짜라란 펼쳐졌다.
"아빠랑 쏙 빼다 박았네!!"
음.... 솔직히 낳자마자 조금 놀랐다. 다들 못생김이 상상 이상이란 얘긴 했지만.. 양수에 퉁퉁 불어 있는 아이 얼굴은 불타는 고구마를 닮았는데 그 안에서 남편을 쏙 빼다 박았다는 시어머니를 지켜보니 조금 피곤해지는 일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역시나 남편 어릴 적 사진을 수시로 보내시면서 어쩜 이리 똑같냐고 하시는데 도대체가 어디를 닮은 건지... 나도 궁금했다. 남편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할 만큼 나도 그러길 바랬지만 객관적으로 찐빵을 닮았다..(내 새끼... 괜찮아.. 귀여웠어) 그 이야기는 커갈수록 엄마를 닮아가는 모습에 점점 사그라드셨다. 엄마는 나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꾸 나에게 몰래하셨다.(엄마..내가 챙피해? 당당하게 얘기하라구!)정말 한동안은 아들과 손주를 동일시하는 모습은 시댁에서는 빠지지 않는 당연함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안 좋은 습관이 나올 때만큼은 빛보다 빠른 손절을 하신다.
시가는 아이가 친가 쪽을 더 자주 봐야 하고 더 친해야 한다는 생각이 깊다. 당연히 친가 제사도 참여해야 하고, 친가 행사는 무조건 손주들도 필참이다. 그런데 친정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들이 일반적이다. 언제부터 외손주, 친손주에 대한 구분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나의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친정, 친가는 모두 아이를 사랑하는 조부모님이고 아이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도 다르지 않다는 걸 꼭 알았으면 한다.(엄마.. 자주 갈게요..)
시가의 안부전화와
처가의 안부전화의
온도차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시댁 단톡 방은 없는 집이 없고, 처가.. 그러니까 남편과 친정과 함께하는 단톡 방은 정말 드물다. 여기서부터 어쩌면 안부전화나 연락에 대해 방향이 갈린다. 결혼 전부터 줄곧 시댁에 안부를 여쭙고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오거나.. 하는 날은 덤이다. 그럼에도 조금의 텀이 생기면 마치 내가 큰 죄를 지은 죄인이 되곤 했다. 내가 아무리 열 번을 잘해도 한 번을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게 며느리 인가보다. 그렇다면 사위는 어떨까?? 정말 열 번 안 하고 한 번만으로도 우리 사위는 살갑고 싹싹한 최고의 사위가 된다. 애초의 친정은 사위의 안부전화를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반갑고 시댁은 당연한 도리이고, 의무라고 생각하시기에 한두 번만 건너뛰어도 쓴맛 나는 카톡이 온다.
나는 요즘 시가에 연락을 잘하지 않는다. 일 년 중 생신이나 어버이날에만 연락을 하는 남편 전화에도 연신 고마워하시는 친정 부모님 목소리를 옆에서 들으니 그냥 하기 싫어졌다. 남편은 찾아뵙지 못하는 마음을 전화 한 통으로 대신해도 환영을 받는데 나는 생신, 어버이날, 명절까지 다 찾아봬도 연락까지 자주, 잘... 해야 하니 조금 억울하다. 그리고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이렇게만 하고 살아도 노력이 필요한데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할 거라면 시작하지 않기로 했다.
결혼에 대한
시가와 친정의 동상이몽
처음에는 시가가 엄청 유별난 집안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적응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집도 일반적이진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친정은 결혼 전부터 성인이 되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그러니까 모든 결정과 책임은 스스로 지는 것이라고 늘 상 강조를 하셨기에 내가 하려는 어떤 일에도 크게 관여를 하지 않으셨다. 그저 결정에 아낌없는 응원뿐이다. 그렇기에 결혼은 당연히 완전한 분리라고 생각하는 반면 시댁은 우리 집과 너무나 상반된 분위기다. 결혼은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합류한 것이고, 더욱더 똘똘 뭉쳐야 한다는 아주 단합된 문화가 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건 우리 가정사를 어느 정도까지 공유를 해야 하는 건지,, 왜 그게 당연한 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예를 들면 가구를 교체 하거나,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거나...남편이 알아서 쪼르르 시가에 이야기할 때만 해도 내버려 두었다가 아이를 낳고 나서 그 의무가 자연스레 나에게 넘어오면서 나는 불안 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의 모든 걸 알고 싶어 하셨는데 내가 예민한건지, 정말 그게 이해가 안된건지는 시간이 흐르고 알았다. 나는 모든 의무를 내려놓고 육아에만 힘썼다. 애하나 보는 것도 힘에 부치는 나로써는가장 먼저 내려놓은 당연함이었다. 점차 하나둘 씩 무겁고 불편한 당연함과 그에 따른 의무들을 비우기 시작했다.
아들 집과 사위 집
(내 집은 없네?..)
나는 기억한다. 우리가 변두리 어느 작은집을 은행과 힘을 합쳐 샀을 때였다. 이사 다니기도 힘들고 전세금과 매매가 큰 차이가 없을 때라 결심을 했다. 그때 아버님의 전화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귀가 눈치 없이 밝음)
"집은 누구 명의로 하는 거냐???"
그 집은 우리가 결혼할 때 함께 모은 자금과 빚을 내서 샀다. 모은 돈 안에는 내가 자취를 하면서 모은 돈과 보증금도 포함돼 있었고 빚도 함께 갚았다. 물론.. 남편이 월등히 더 많은 돈을 모으긴 했었지만 그래도 나의 자금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이야 이렇게 치사스럽게 일일이 따지지만 그전에는 당연히 남편 명의로 할 참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해놓고 나서 아버님의 염려(?)를 들으니 뭔가 배신감이 들었다.(딸 같다면서요.. 딸 명의로 할 수 있잖아요..) 내가 공동명의로 하자고 한 것도 아니요, 내 명의로 해달란 것도 아닌데.. 왜 누구의 명의가 그렇게 중요하신 건지. 나중에서야 느낀 거지만 집 명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가벼운 게 아니었다. 시댁은 그 집을 아들 집이라고 생각하시기에 편히 오고 싶어 하셨다. 반면 친정은 그 집은 딸이 혼자 사는 집이 아닌 사위가 있는 집이라는 생각에 한 번을 오셔도 언제나 미리 날을 정하고 오신다. 아이를 낳고 시어머니가 집에 오셔서 하셨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 친구는 딸이 애를 낳았는데 오라는 얘길 안 해서 못 가고 있단다~"
그냥 가면 될걸 기다리는 친구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 같았다. 아니면 편하게 못가는 친구분이 안타까우신 모양이다.
백년손님 사위와
백년 이방인 며느리
명절 때, 제사 때 사위가 두 손 거들고 주방으로 뛰어드는 풍경은 나는 본 적이 없다. 우리 아버지 또한 할아버지 제사 때야 이것저것 거드셔도 외가댁에 가서 주방을 들어가는 모습은 기억에 없다. 남편도 어쩌다 한 번가는 친정 부엌은 단 한 번도 구경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친정에서의 남편의 역할은 차려진 음식을 열심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것뿐. 그 누구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반면 며느리는 시댁에 가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방에서 분주한 시어머니 곁을 맴돌며 일거리를 찾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편과 함께 앉아있으면 천하에 몹쓸 며느리가 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딸 같은 며느리' 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딸처럼 생각하신다는 시가와 함께 한지 5년 정도가 지나 보니, 희생이 필요할 때는 가족이었고 배려가 필요할 때는 남이었다. 일손을 도울 때나 가족행사에는 가족이니 당연히 참여해야 하고, 가족으로서 존중받고 싶을 때는 선을 그으셨던것 같다. 내가 말하는 존중은 별것도 아니다. 그냥 하나의 독립된 가정으로, 어른으로 인정해 주셨으면 했던 것이다. 부모님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린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성인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하신다. 나는 딸 같은 며느리가 되고 싶지도 않고 가족도 아니고 남도 아닌 그저 적당한 거리의 이방인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주변에서 친정과 시댁은 같을수 없다고들 한다. 나도 똑같기를 바라는건 아니지만 다른게 당연하다는게 싫다.
며느리도 손님이 되고 싶습니다.
시가에서 명절과 제사에 참여하는 며느리는 나 하나다. 물론 며느리가 나밖에 없는 건 아니다. 큰 아버님 댁에도 며느리가 한분 계시는데 어쩌다 시간이 될 때만 작은집에 방문을 한다. 그래서 같은 며느리지만 큰집 며느리는 손님이고 나는 그분들을 어머님과 작은어머니와 맞이한다. 그것 또한 당연한 듯한 이분위기를 뭐라 설명할 수가 없다. 큰 아버님 댁 큰며느리는 외국에서 지내셨다. 그렇기에 제사는 그저 신기한 문화이며, 그 어떤 의미도 없다. 제사나 명절의 산더미 같은 집안일에도 자유롭기 때문에 식사만 하고 가시거나 못 오시는 것에 대한 미안함은 갖지 않아도 된다. 안오신다고 해도 얄밉거나 서운함조차 없다. 다만 왜 나는 손님이 되지 못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누가 나한테 시킨 것도 아니다. 처음에 아무것도 안 시키는 그 서먹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것저것 거들었을 뿐이다. 아무것도 못하게 쉬길 바라시면 당일날 오라고 하시면 참 좋을텐데...
언젠가 웃으면서 시어머니께서 우리 세대까지만 제사를 지내고 끝낼 거란 얘길 하셨다. 그게 언제며, 나도 같이 수년을 거들다가 이제 끝! 하면 그 책임감에서 하루아침에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어쩌다 가지 못한 제사에도 그렇게나 죄송했는데 앞으로 "이제 제사에서 벗어납시다, 여러분! "이게.. 되는 건지 의문스럽다. 시어머니의 시부모님에 대한 도리를 다 하고 싶으신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아마 나도 시부모님이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거창하게는 아니어도 기일에 대한 최소한에 도리를 할 생각이다. 그런데 내 자식들이 내 시부모님, 내 부모님 제사에 손발 걷고 나설 필요까지는 없다.
어머님 세대에서 끝내신다면 나부터 적극적으로 빠져야 후에 앞으로 만나게 될 작은집, 큰집 며느리들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구하나 제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서운하고, 죄송할 일들을 나부터 만들면 안될것 같단 생각이든다. 사실 제사 전날 다 같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며 일손 하나 거드는 게 죽을 만큼 하기 싫었던 건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상하게 시댁은 제사가 끝나고 식사를 할때, 남자들이 안쪽 자리, 여자들이 주방과 가까운 쪽에서 식사를 한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어머니와 작은 어머니가 안쪽상에 비워지는 음식들을 살펴가면서 식사를 하는 모습은 우연이 아니었다. 빈그릇이 생기면 식사를 하시다가도 그릇에 음식을 가득 채우고 마저 식사를 하시는데 그게 너무나 익숙한 분위기였다. 같은 상에서 먹는 나는 그 상황을 지켜보자니 체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어머님은 항상 식사가 끝나면 아버님 물까지 챙겨드리고 후식을 따로 챙겨서 나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다. 힘들게 김장을 해도 김치 맛에 대해 늘 혹평을 들으셨고, 아버님의 말 한마디에 언제나 바로 행동하셨다. 우리에게 어떤 뭔가를 전달하실 때도 늘 아버님의 의견을 주셨고, 아버님께 이렇게, 저렇게 하면 좋아하신다며 늘 나에게 안부 연락을 하라고 하셨다. 물론 집안의 가장이시고 존중받아야 하는 건 마땅하지만 그 어디에도 어머님은 없었다. 그리고 그게 당연했다. 시대가 아무리 다르다 해도 너무 순종적인 분위기다. 남녀가 한치의 오차 없이 모든 게 평등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서로 같은 위치에서 존중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유별나고 유난스럽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저 따라가기 바빴는데 어머님의 그런 고단하고 바쁜 삶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아예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매년 제사에 가서 불편하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전을 부치면서도 당연한 도리를 하느니 조금 용기를 내서 별나단 소리를듣기로 했다. 제사를 안 가기로 했고 김장도 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죄송했고 죄책감도 느꼈다. 그러나 명절과 생신 때마다 찾아뵙고 다 같이 식사하는 걸로 나는 내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아마 당분간은 귀가 간지럽고 며느리가 잘못들어왔단 소리도 들을 것이다. 나의 시댁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럼 그 어떤 역할을 노골적으로 바라시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가 아프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제사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직은 받아들이지 못하신다. 나도 남편이 친정에 갈 때처럼 정해진 프레임에 벗어나, 어쩌다 가도 환영받는 손님이 되고 싶다. 시댁은 사정이 생겨서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지만 언젠가는 며느리가 남편의 조부모님 제사에 오지 않아도 당연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