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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쟌 Dec 18. 2020

며느리의 거절은 사양한다

제 거절을 받아주세요.


거절이라는 것은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마음 편한 일만은 아니다. 나는 유독 거절을 잘 못해서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편한 게 우선이었다. 무엇보다 거절을 하고 나서도 찝찝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서도 우리 집과 분위기가 다른 시댁일에 거절을 해본일이 거의 없었다. 결혼과 동시에 독립과 하나의 가정을 중시하는 친정과 새로 합류한 신가족과 화합을 중시하는 시댁과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된 것이다. 30년이 넘는 시간을 부모님과 살아온 남편과 일찍이 자립을 한 나와는 사고방식부터 습관까지 모든 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낳기 전까지도 우리는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방식에 남편이 맞춰주길 바라지 않았고 남편의 살아온 시간들을 이해하려고 했다. 시댁에서 오라고 하면 무조건 찾아뵙고,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늘 가깝게 지내야 했다. 그게 자발적인지 암묵적 강요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절을 하기 힘들었던 건 확실하다. 막상 가면 남편 이야기만 하시곤 했는데 결혼 전에 아들이 여자는 엄마밖에 몰랐다, 매일 엄마를 안아주는 다정한 아들이었다... 까지만 하시면 좋겠지만


"너한테도 그러니?"


정신 차리자. 집중! 시험이 시작됐다.. 처음 들었을 때는 지나가는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반복되니 질문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다. 내 아들은 나에게만 그랬으면 하는 건지 아내한테도 다정한 남편이었으면 하는 건지... 첫 번째 바람은 조금 섬뜩해서 후자를 택했다.(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토록 남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결혼 전에 상상해 본 적도 없을 만큼 그저 신기했다. 우리 엄마는 남동생이 결혼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가 그 후로는 원래 아들이 없었던 것처럼 사시는데 집집마다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생소하기도 하고 걱정도 됐지만 이거 무를 수도 없고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그렇게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씩씩하게 적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번 들어오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공포의 시댁 단톡 방에도 초대가 되었고 연중무휴로 가동되었다. 깨똑 깨똑



내 기억에는 아이 낳고 산후조리 때 처음으로 거절을 했던 것 같다. 그때 매우 긴장이 되고 떨렸는데 그 와중에 용기 내서 한 거절을 다시 거절당할 줄이야. 하하.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했는데 오며 가며 밥도 해주고 챙겨 주고 싶다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오시긴 하셨는데 어머니의 오며가며와 나의 오며가며의 뜻이 달라서 어머님은 안가셨다. 그래서 한 달가량을 계시겠다는 어머님께 너무 힘들어서 2주면 충분하다고 거절했다. 결국엔 조리받는 며느리는 거절당했지만 조리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튼튼한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가셨다는 것은 참으로 씁쓸 거절의 기억이다.



처음으로 내의사를 말씀드리고 사양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는 얻지 못했고 어느 누구 하나 마음 편한 사람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거절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보단 거절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기지 않길 바랬다. 나는 정말이지 거절이 어렵다..ㅠ


그동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힘든 부분은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하셨는데 이야기를 하니 먼지와 뒤섞여 감쪽 같이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거절을 할 상황은 애초에 없던 것 같기도 하다. 시댁에 가야 할 일도 남편에게 오라는 이야기가 끝이었기에 어찌 보면 거절이고 승낙이고 해 볼 기회도 많지 않았다. 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야 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럼에도 크게 서운하거나 불만이 없었던 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정선에서 균형을 이루게 될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내가 했던 거절은 정말 힘들게 생각하고 한 거절이다. (날이면 날마다 하는 거절이 아니라고요..)



나의 거절로 인해 상대가 나에게 미안해하거나 애써 덤덤한 모습은 거절을 후 오는 찜찜함의 이유이다. 그 모습이나 목소리가 참으로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는다. (그럼 거절을 하지 말든가.. 그것도 아니고 답답한 성격일세) 그랬던 나도 내가 그간 생각해왔던 거절 후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니, 죄책감은 조금 덜게 되었다. 내가 아이에 관해서 어떤 거절을 해도 나에게 거절이 돌아왔다.


신혼 때부터 뭐든지 직접 챙겨야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시는 어머님은 괜찮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살림이며, 음식이며, 모든 일들을 직접 참여하셨다. 그러한 스타일이 아이가 생겼다고 해서 달라질 리 없었다. 오히려 더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고 생각하셨다. 내가 밥을 줘도, 재워도, 안고 있어도 아이를 달라고 하셨는데 일하거나 육아에 지쳐 있다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배려는 받는 사람이 원치 않을 때는 더 이상 배려가 아닌 강요가 된다. 수시로 오는 전화에 나는 조금씩 어머님이 어려워졌다. 남편이 사진을 보내면 전화는 나에게 오는데 아이의 얼굴에 조금만 빨개도 괜찮아질 때까지 물으신다. 집에 친척이 올 때면 아이를 데려 올 수 있냐는 연락이 오면서 어느 순간 거절 포비아가 생겼다. 문자나 전화 소리만 들려도 긴장이 됐고 수시로 아이를 언제 맡길 거냐는 어머님의 물음에


"어머니, 아이가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한 만큼 엄마로서의 삶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요. 지금 둘에서 셋이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남편과 서로 도우면서 해보고 있어요. 제가 정말 힘들면 도와줄 남편도 있으니 걱정 마시고 지켜봐 주세요..."


오히려 독박 육아보다 매일 거절해야 할 일들이 더 힘들고 어려웠다. 자주 안 보는 것도 아니고 친정부모님 일 년에 한두 번 볼 때 거의 매달 두세 번은 보는 것 같은데.. 얼마나 보셔야 만족을 하시는 건지 다 맞춰드리다간 정말 아이를 시댁에 보내야 할 것 같다. 처음엔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마음이 다칠까 걱정... 은 개뿔. 지독한 효자 남편에게 말해봐야 돌아오는 반응은..


"얼마나 보고 싶으시면 그러겠어"


"아..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우리 엄마 아빠도 아기 보고 싶을 때마다 너에게 전화를 하시라고 할게. 잘해보게나)


정말 가능한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저런 소름 돋는 효자 논리로는 안 싸우는 것도 이상할 일이다. 백일과 돌 때도 우리 부부가 정한 내용을 양가 어른들께 각자가 전달하기로 했는데 남편은 전하라는 얘 긴 안 하고 시부모님이 정하신걸 나한테 친절히 전해주었다. 백일 때도 가족사진 한 장 찍고 소박하게 기념하고 싶어서  지방에 계신 친정부모님도 못 오시게 했지만 시댁에는 소용없었다. 아이 선물과 큰집에서 받은 돈봉투를 전달해주시러 오셨는데 그 마음이 그토록 버거울 수가 없었다. 남편이 빙구같이 전달을 해서 이번엔 내가 직접 말씀을 드렸음에도 이러시니 감사하지가 않았다. 주는 마음만 중요한 건 아닌데..



항상 부모님 편에서 이해해달라는 효자 남편은 아마 효도하려고 결혼을 한 게 분명했다. 명절에 시댁을 가면 친척들께 아기를 안아보라며 후한 인심을 쓰시는 어머님을 보면 나는 낯가려서 걱정을 했고, 남편은 아이가 있어 부모님이 저리 좋아하시니 잘 낳았다고 한다. 시댁만 가면 눈물겨워서 남편을 거기 두고 오고 싶을 때가 많았다.(언젠간 꼭...) 그런 효도르 남편도 서서히 나의 입장을 이해하는 일들이 생겼다. 나는 남편이 내가 겪는 일들을 똑같이 경험하길 바라지 않지만 최소한 이해는 해주길 바랬다. 지금 까지 봐온 남편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남편도 의도치 않게 거절을 거절당했다.(반갑다 동지)



시부모님은 항상 당일날 문자나, 전화를 하고 오셨는데 거의 내가 혼자 아이를 보고 있을 때였다. 갓난아이를 키우다 보니 잠을 못 자는 건 기본이고, 시간에 맞춰 수유와 유축을 하다 보면 집이 엉망일 때가 많았다. 내가 오늘 세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까먹고 밥 한번 맘 편히 먹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내가 더 힘들었던 건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불안함이었다. 항상 아버님의 시간이 비어있을 때 오셨는데 그 시간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적응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내 몸이 이상했다. 구내염이 낫질 않고, 몸이 그렇게 피곤한데 잠이 들지 않았다. 두통이 심해서 걷기가 힘들 때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다가 모유까지 줄어드니 걱정이 됐다. 그쯤에 친정엄마가 서울에 오셔서 나를 보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우셨다. 살도 많이 빠지고, 얼굴이 그렇게나 엉망징창(?)이었다고..(에이.. 그 정돈 아니었잖아..)


매일 보는 남편은 잘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의 눈물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에게 부탁을 했던 것 같다.


아이 키우는 건 힘들어도 즐겁고 보람되지만 마음이 불안할 때가 많고 긴장도 많이 된다고 했다. 문제는 그게 아이 때문이 아니라 시부모님의 서프라이즈 방문 때문인 것 같다고, 일반적으로 그 관심이 사랑이라 할지라도 받는 사람이 준비가 안됐다면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남편은 많이 서운해했다. 우리 부모님이 너를 그렇게 불편하게 할리가 없고(아들은 못 느끼는 불편함이 있어) 그렇게 느꼈어도 그런 의도가 아닐 거라고..

그럼에도 오시는 횟수를 자기가 줄여보겠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사실 큰 기대를 한건 아니었고 그저 내가 좀 어렵고 불편해한다는 걸 공감해 주길 바랬던 것 같다. 남편이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변화가 되었는지 결과는 아주 보잘것없었다. 남편은 오시겠다는 부모님께 어떤 거절도 하지 못했고 잠시 들리는 거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별일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명치를 어택 할뻔했다.


 

눈물이 났다. 그간 쌓아온 감정들이 쏟아졌다. 아이를 낳고나서부터 단 한 번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고, 아이의 관심에서 며느리에 대한 배려를 나는 느끼지 못하겠다.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했고 나아질 줄 알고 참았는데 더자주, 더 많이 늘어나는 연락과 방문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이해까지는 아니어도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은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복받치는 설움을 토해내니, 이제 되도록 자신이 가겠다고 한다. 보통 어머님은 음식이나 살림살이들을 주러 오셨는데 그런 것들을 자신이 가서 받아 오겠다는 것이다. 그러시등가 말등가... 알아서 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주 파이팅이 넘쳐서 몇 번을 가다가 그 횟수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늘어나니 파이팅은 사라진 지 오래고 매우 피곤해 보였다. 가지고 오는 것들은 과일, 반찬, 각종 김치, 사골, 반찬 재료, 구황작물, 그리고 주변에서 깨끗이 사용했다는 아기 옷이나 물건들.. 남편은 항상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왔다. 한 박스로는 모자라 두 박스인 것도 있었다. 우리 집 감자는 싹이 나서 잭과 감자나무가 된 지 오래고 작년에 주신 것들도 아직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냉장고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매끼 밥과 반찬을 해먹는데도 왜 줄지가 않는건지..이것은 나의 문제인가? 그래도 힘들게 해주신 음식은 버릴수 없었다. 나는 매번 테트리스 고수가 되어 켜켜이 집어넣었지만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하는 것들이 생겼다. 그 죄책감은 또다시 내 몫이고, 나는 받아도, 안 받아도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의, 할머니의, 동생의 택배는 늘 우리 집까지 올 수 없었고, 나는 친정에도 거절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매번 괜찮다 거절하는 나 대신 남편에게 바로 연락을 하셔서 부르셨다. 남편이 그때서야 나에게 미안해했던 것 같다. 자신이 생각 없이 받아오거나 차려져 있을 땐 몰랐지만 가서 받아와 보니 그 양이 생각보다 많았고 그걸 직접 주러 오신다고 했다면 내가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하.. 이제라도 알아주는 거니?.. 아는거 맞지?)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은 위로가 됐다. 외로웠었다. 나만 홀로 거절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 이런 상황들을 함께 고민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남편은 며칠 후에 자신이 본가에 가서 확실히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집에 먹지 못한 음식이나,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쌓이고 있으니 다 먹고 나서 우리가 알아서 해 먹겠다고 했다는데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간지 전혀 몰랐다. 그 시점부터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변한 게 하나 있다면 남편이다. 본인은 나와 다를 줄 알았겠지만 거절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거절을 거절당하게 된 것이다. 그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건지 차츰 알아가고 있는 듯했다.



어머님은 주변에도 도움을 많이 주시는 편이라 나에게도 그분들께 도움을 주길 바라신다. 친구 딸이 내가 딴 자격증을 준비한다고 하니, 전화해서 학원을 알려주라고 하셨을 때는 처음으로 언짢음을 표현했다


"어머니. 친구분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친구분 딸에게 전화를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학원을 알려 드릴 테니 어머님이 알려주세요"


이렇게 말씀드리고도 이래도 되는 건지 싶었다.


"그런가? 그럼 네 번호를 알려줄 테니까 연락 오면 이것저것 잘 얘기해줘. 도움받을 데가 없다는구나"


다행인 건 내가 걱정할 만큼 기분이 상하지 않은 것이고, 불행인 건 그래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그 자격증은 우리 며느리가 땄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정보를 주겠다고 하셨거나 지인의 부탁이 있었겠지.. 어머님도 어쩔 수 없으셨겠지.. 나는 언제나 모든 상황을 나름의 합리화와 상대방의 의도를 내가 마음 편한 쪽으로 해석하고 넘어갔다.


그래도 궁금했다. 왜 거절을 모른척하시는지..

마침 사촌 결혼식에서 시어머니가 된 고모들과 밥을 먹게됐다. 내 사정을 모르는 고모들은 답을 알고 있겠지.


고모 1 "혹시 시골에 계셔? 농사지어서 좋은 거 보내고 싶으 신 거 같은데?"

"놉! 서울에 사시고, 농사 안 짓고 마켓 꼬불이랑 코팡 자주 이용해"


고모 2 "취미생활이 없으셔서 그럴 수 있어. 아들이랑 손주 보는 낙이 엄청 크신가 보네"

"놉, 항공사 일했던 나보다 더 많은 나라 가보셨고, 꽃꽂이 학원 다니셔... 핵인싸임"


어머님과 비슷한 연령대인 고모들은 그렇게 며느리한테 해주고 싶어도 귀찮아서 못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거절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며느리의 '괜찮다'는 거절보다는 예의상 하는 말처럼 들을 수도 있다는 것. '어머님이 고생하시니 괜찮다'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는 순간 주는 사람은 사실 거절이라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분 좋고 듣기 좋은 거절은 없으니 잠시 서운해도 의사표현을 확실히 하는 게 서로를 위한 거라고 고모들은 입을 모았다.



결국은 내가 눈치가 없던 거였다. 아마 시부모님은 예전과 지금이 변함없다고 생각하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좋아했다고 생각하셨을 거고 그 좋아하는 것을 자꾸 해주고 싶은 마음을 나도 알고 있다. 지금까지는 감사하다고 받아 놓고 어느 순간 부담스럽다니,, 이건 아마도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서로의 적당함이 많이 달랐다. 어떤 상황이 와도 끝까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미움받더라도 완곡히 거절을 했어야 한다. 나는 그것조차 모호했던 것이다. 늘 내가 해오던 방식으로 거절을 했고 불편하지 않게 마무리되어서 내 표현에 문제가 있는지 몰랐다.



항상 거절하기 전에 어떻게 이야기하면 마음이 다치지 않게 전달이 될지 고민을 했다. 무슨 영어 작문도 아니고 부드럽고 친절한 단어들만 골라서 듣기 좋은 거절을 했었다. 엄마한테 했던 거절과 시어머니한테 했던 거절을 비교해보면


"엄마. 김치 보내지 마, 자리 없어서 먹지도 못하고 버려야 돼.. 그리고 지난번 김치 좀 맵더라, 액젓은 뭘로한거? 고춧가루 매운거지?그리고,₩%{₩ㄱ나ᄌᆞㅅㄷㅂㄴ"(다시 저년에게 그 무엇도 보내지 않겠다.)


"어머니, 감사하긴 한데 김치가 아직 많이 남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나 고생할까봐 걱정하는 저마음..감동의 물결이 찰랑찰랑..)



괜찮으면 괜찮은 거지 같아요는 또 뭐람? 무엇보다 내 감정이 중요하다면서 타인의 배려까지 생각하는 건 살짝 주제가 넘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을 찾다가 서로에게 쓸모없는 거절을 하고 있었다. 거절은 분명 기분이 안 좋을 수 있고, 서운할 수 있지만 그런 감정을 느껴야 거절의 이유를 들춰볼 수 있다. 여전히 거절을 거절당하고 있긴 하지만 예전처럼 빈집에 물건만 두고 가시거나, 하루 두세 통의 연락은 오지 않는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도 있었는데 눈앞에 새로운 불편함에 가려 놓치고 있었다. 기특하게도 남편이 중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어 거절할 상황은 피해 가고 있다. 앞으로 거절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는 정말 나의 감정에 힘을 실어 이야기해보고 싶다. 거절이라는 게 하는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어려운지 반드시 아셔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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