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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성 Mar 26. 2024

상관없어야만 살아낼 수 있던 삶에게

『파친코』(이민진)를 읽고


 고난을 견디는 최후의 방법은 그것을 운명이라 믿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책의 첫 문장은 그래서 저릿하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고통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리는 한숨 같아서, 그리고 상관없어야만 살아낼 수 있는 인생 같아서.


『파친코』는 1910년 일제 강점기부터 독립 이후 1989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본래 한국에서 살던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살아내야 했던 삶을 그려낸다. 선자와 그녀의 가족은 일제 강점기 조선과 일본에서는 ‘더러운 조센징’이어야 했고, 독립 이후에는 ‘체류자’여야 했다. 마음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럴 생각을 할 여유조차 쉽게 가지지 못했다.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내야 했던 생존의 숙제 앞에서 그저 하루를 견뎌낼 뿐이었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1945년의 독립은 소설 속에서 큰 사건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독립 이후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말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했고, 희생했으며, 숱하게 포기했다. 식민지 통치는 조선의 정치·경제 체제뿐만 아니라, 안온한 일상을 누릴 개인의 삶까지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삭이 천국을 설명하려고 했을 때, 선자가 마음속으로 그린 천국의 모습은 고향이었다. 투명하고 빛나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1권, 376p)


 독립 이후의 삶이 식민지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오히려 더욱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선자와 양진, 경희는 ‘고생은 여자의 운명’이라며 그저 희생한다. 한수의 아들 노아는 이삭을 닮았고 이삭의 아들 모자수는 한수를 닮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하면서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다소 산발적이다. 소설의 명성에 비하여 이야기가 복잡하다는 평을 종종 들었다. 무미건조할 정도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역동적이지 않고, 인물들의 여러 관점이 전환되기에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것이 그저 그들의 삶일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 재앙에 맞선 개개인의 이야기’라는 출판사의 소개에서도 엿볼 수 있듯,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나름의 방법으로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는 각자의 위치에서 산발적으로 흐를 뿐이다.


 그들은 모두 가능성과 두려움, 외로움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매일 아침, 모자수와 직원들은 당첨 결과를 조작하려고 기계를 살짝 손봐서 돈을 따는 사람은 적고 잃는 사람은 많게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운아일 거라는 희망을 품고 게임을 계속했다. 어떻게 성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겠는가. 파친코는 바보 같은 게임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았다.

 소설의 제목은 왜 ‘파친코’여야 했을까. 당시 재한 조선인(자이니치)들이 좋은 직장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파친코 사업을 경영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일까. 선자의 아들 두 명, 그리고 그녀의 손자까지 결국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서일까. 그래도 굳이 파친코 사업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선자와 주변인의 삶에서 유일하게 확실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불확실성이었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조차 사치일 만큼 삶은 그들에게 가혹했다. 선자는 이삭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고, 노아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다. 경희는 요셉의 회복을, 솔로몬은 하나를 기다렸다.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영원히 외부인이어야 했던 그들은 체류 기간을 조금씩 ‘연장’하며 살아간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이 있는데, 그들에겐 상상을 넘어 환상일 뿐이다. 편안하게 발 딛고 살아가지 못했던 이들의 삶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나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을 삼키며, 누군가의 성공 이야기를 위안 삼는다. 마치 파친코에 앉아있는 도박꾼들이 그러하듯 내일의 가능성에 불안한 오늘을 건다.     


"나 같은 조선인들은 여길 떠날 수도 없지.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다를 바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을 일본 놈이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든, 얼마나 좋은 사람이든 더러운 조선인일 뿐이야. 도대체 어떡하라는거야?" (2권, 209p)


 이민진 작가는 미국 시민이자 동양인이고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녀를 호명하는 수식어들을 따라오는 멸칭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 정착하고 살아온 2세대, 3세대 자이니치들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남다르게 다가갔을 것이다.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고향이 자신을 옥죄는 차별의 근원이 되고, 평생을 걸쳐 살아온 공간에서 여전히 외부인이어야 하는 삶의 이야기는 여전히 무겁다.     


 끝내 일본인이 되지 못한 노아가 방아쇠를 당길 때, 그리고 삶의 끝에서 양진이 그녀의 응어리진 마음을 선자에게 일갈할 때, 그들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하소연해보아야 바뀌는 것이 없음을 인생 전체를 바쳐 확인해야 했던 그들의 움직임은 방향만 달랐을 뿐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선자가 자신의 전부였던 두 아들의 사진을 이삭의 묘에 묻었던 것은 어쩌면 괜찮아야 괜찮을 수 있었던 삶에 대한 체념은 아니었을까. 책장을 덮어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던 이야기의 끝이 유난히 무거운 것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그들의 삶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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