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대여성 Oct 23. 2020

따라쟁이 친구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나를 좋아하면서도 좋아하지 않았다. 진심 어린 칭찬의 말을 해줄 때도 있었고 질투가 찬 눈빛을 할 때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외모에 관심이 많았던 그 친구는 본인의 몸매나 외모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성인이 되면 어떤 시술을 할지, 어디를 성형할지에 대한 계획도 많이 하는 친구였다. 겉모습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다지 스트레스로 다가올만한 외모 콤플렉스는 없었다. 없었다기보다 내 몸과 얼굴을 자세히 따져가며 보는 일이 없었기에 인지하지 못했고, 모르니까 신경 쓰는 일이 없었다.


본인이 속해있는 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과 본인이 속해 있는 세상을 잘 인지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일 수도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 한국의 외모지상주의는 극에 달해있을 때였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나를 따라 하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관심과 애정인 줄 알아서 고마웠다. 이런 게 베스트 프랜드의 진짜 우정이구나 싶었다. 서로 물물교환도 자주 했다. 무언가를 빌려주고 빌리는 일도 많았다.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친했던 만큼 서로의 집도 자주 드나들었고 집에서는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지도 대략적으로 꿰뚫고 있었다. 공부를 할 때였으니 내 책상 곳곳에는 '나는 할 수 있다' '무조건 된다!' '자신감과 의지를 갖고 노력하자' '꿈은 이루어진다' 등의 문장들이 포스트잇에 적혀 있었다.


얼마 후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니 비슷한 문구들이 똑같이 포스트잇에 적혀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포스트잇의 색상과 위치도 모두 비슷했다.




사람들과 만나 놀고 사진을 찍어 업로드하면 그 친구는 사진 속 내 착장들을 기억해뒀다가 그대로 빌려달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옷은 물론 신발이며 액세서리까지 빌려달라고 했다. 빌려주는 건 상관이 없었지만 나와 똑같이 꾸미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어쩌다 한두 번이던 행동은 세 번, 네 번 그렇게 점점 늘어갔다. 그만큼 나에게 다가오는 스트레스도 커졌다. 간접적으로 돌려가며 말해도 직접적으로 비꼬며 말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해봤지만 크게 공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친구 험담이나 하는 자기애 가득 찬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었을 거다.




별것도 아닌 것부터 시작해 따라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까지 전부 따라 했다. 본인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그 친구는 가끔 교묘해지기도 했다. 누군가를 베껴놓고는 원래 본인이 그렇게 했던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마음속에는 조금씩 그 친구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이 생겼다.


친구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감정들은 점점 부정적인 것들로 변했고 서로에 대한 신뢰 역시 깨지기 시작했다. 예전만큼 연락하는 일이 줄었고 각자 다른 친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많은 것에 예민한 시절이었던 만큼 이런 사소한 감정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결국 관계를 깨트리는 발단이 되었다.


일은 터졌고 뿌리를 깊게 내린 부정 감정은 우리를 완전하게 갈라놓았다. 언젠가 끊어지겠지 싶게 매달려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연락이 끊긴 지 몇 년 지난 후,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전화를 하면 받지 않을 것 같아 카카오톡을 통해 장문의 메시지를 여러 개 보냈다. 답장이 왔었는지 오지 않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과는 전한 사람보다 받는 사람의 입장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과를 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나이를 먹었고 어른이 되고 사회인이 되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상실이라는 감정을 깊게 겪은 그때 이후 분명한 형태를 가진 단단한 인간관계를 만들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나에게는 줄곧 '따라쟁이 친구'에 불과했던 그 친구는 야무지게 인맥관리를 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는 것 같았다. 개인 일을 하고, 동호회 활동을 하며, 오랜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고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건너 건너 보고 전해 듣게 되었다.




최근 읽은 책에는 '사람은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해마다 때마다 다르게 형성되는 개인의 성향으로 인해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배우고 있는 걸까. 현재의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는 그때의 모습도 내 모습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미화된 과거의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걸까.


이해하기 싫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던 그때의 일들을 생각하면 참 어렸구나 싶기도 하고, 결국 부딪히고 깨질 관계는 어떤 이유로든 건강하지 않게 마무리가 되는구나 싶기도 하다.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또 누군가가 대놓고 혹은 은밀하게 나의 많은 것들을 따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같은 실수를 하고 같은 후회를 반복하려나 싶다








작가의 이전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