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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Nov 07. 2023

너무 작은 내 품

내가 안아주지 않아도 행복하길 


지금은 너를 안아줄 수 없어. 미안해. 내겐 너를 안을 품이 없어.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그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너무 잘 알 것만 같아서 옮겨 적는다.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빵이가 살고, 새끼들을 낳았고, 새끼들은 또 도로가로 나와 돌아다니고, 빵이는 자기에게 조금만 애정을 주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에게 마음을 줘 버린다. 그 사람을 쫓아가 그 사람의 집 앞에, 그 사람의 차 밑에서 쉰다. 

나는 새끼들을 마주칠 것이 무서워 애써 그곳으로 향하는 마음을 붙잡아둔다. 지난봄에 그랬던 것처럼. 지난봄에 그랬다가 덜컥 또 마음이 걸려 봄이와 포이를 데리고 온 것처럼. 

빵이의 이름은 내가 지어주지 않았다. 빵이 에게는 주인이 있다. 내가 주인이었다면 강아지를 그렇게 키우지 않을 텐데. 내 강아지를 외롭거나 아프지 않게 하려고 애쓸 텐데. 

빵이를 구하지 못하고, 중성화 수술도 시켜주지 못 한 나는 애써 그게 내 책임이 아니라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마음을 잡는다. 그전에 벌써 외면하고 버렸던 강아지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마을 어귀 하우스 앞에 늘 외롭게 묶여 있는 강아지를 생각한다. 그래도 빵이는 풀려 있다고. 빵이가 묶여 있던 공터, 빵이의 주인이 주인인 공터에 또 다른 검은 강아지가 묶여 있다고 한다. 나는 가 보지 않았다. 아이비가 묶여 있던 집에도 작은 검은 강아지가 묶여 있다고 한다. 한림에 자주 가는 카페 근처의 큰 창고 앞에 짙은 베이지색의 강아지가 묶여 있다. 나는 그 아이가 백미, 현미의 형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한참을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발걸음을 하진 않았다. 동네 새로 생긴 미용실 옆 창고 앞에 어린 검은 강아지, 재작년에는 아기였던 고산 길 어귀의 백구, 생각할수록 무수히 많은 길가의 강아지들이 있다.     

강아지들을 입양 보내고 나는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 많은 애를 썼고, 행복하게 지내는 강아지들을 보면 기쁘지만, 그만큼 남아있는 강아지들에 대한 미안함도 커진다.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나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포이를 토론토로로 보냈다. 이른 아침 인천 공항에서 보내고 다음날 새벽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무척 마음을 졸였다. 그러고 나서도 가족과 만나 새 집에서 잘 적응했는지 궁금하고 걱정됐다. 그날 아침 바로 포이의 새로운 가족이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내 계정을 팔로우했다. 나를 팔로우하는 계정은 강아지가 주인인 경우가 많은데, 하얀 강아지 얼굴의 새 팔로워가 포이일 거라는 생각은 순간적으로 하지 못했다. 그래도 들어가서 보니 포이였다. 낯선 배경에서의 포이. 축축한 초록색의 잔디 위에서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떤 표정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힘차게 뛰고 있었다. 새 하네스도 하고, 맛있는 간식도 먹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줄곧 하고 있던 파랑색 이름표가 선명해 보였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토론토의 공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차갑고 축축한 가을의 공기. 영상 속의 가족들은 윈드재킷을 입고, 장화를 신고 있었다.      

포이가 잘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 걸 보고 나서도 서울에 있는 하루 종일 멍한 채 좀처럼 정신이 들지 않았다. 출발할 때 못 챙겨준 것들이 자꾸 생각나고, 포이와 함께 지냈던 하루가 아쉬웠다. 제주에서 더 자주 만나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서울에 간 김에 현대 미술관에 갔고, 어두운 공간에서 춤추는 무용수의 영상을 보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자 드디어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공항에 갔는데, 내가 타기로 한 저녁 비행기는 30분이 넘게 연착이 됐고, 제주에 도착하자 멀미가 많이 났다. 집에 가는 길에 매운 떡볶이를 샀다. 요기를 하고, 비어 있는 숙소에서 혼자 잠을 잤다. 핸드폰도 챙기지 않고, 보고 싶던 영화를 10분 정도 보다가 잠을 잤다.      

다음날 절기 학교에 갔다가 장을 보고, 집에 오는 길에 단골 카페에 절기의 편지를 받아 왔다. 그리고 이 글을 적기 시작했다. 작가의 저 문장이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내 마음이 그랬기 때문이다. 포이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는데 잘 지내고 있지 못한 포이의 엄마 빵이, 빵이가 낳은 다른 아기들, 그 외에 많은 강아지들 생각이 더 많이 났다. 미안함이 더 커졌다. 

그리고 공항에서 스쳤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코노미 석과 비즈니스 석에 대한 생각. 퍼스트 클래스와 비즈니스 석에 넓은 공간을 주고, 나머지 공간에 가능한 촘촘하게 이코노미 석을 배치하는 대신 그 공간을 모두가 똑같이 나눠서 쓴다면 어떨까? 우리는 가격에 차등을 두고, 돈으로 편리를 사는걸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아닐까.      

학대받는 동물들은 너무 많고, 그중 구조되는 개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동물들은 말 그대로 ‘운 좋은’ 동물들이다. 누구든 운과 관계없이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는 세상이라면 어떨까? 내 작은 품을 걱정하는 대신, 우리의 큰 품으로 모두를 안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라면 너무 이상적인 걸까? 내가 빨갱이라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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