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 어려울 수 있지만, '유대인 대학살 기획자' 중의 한 명인 아이히만에게도 양심이 있었고, 실제로 때때로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곤 했다.
그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즉 죄의식이 느껴지는 행위란 '수많은 유대인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인간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아이히만의 양심은 살해 자체가 아니라 고통 유발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전체가 히틀러의 전쟁 욕구와 반유대주의에 전염되어 있을 시기에는 수많은 사람의 양심이 아이히만의 경우처럼 작동했던 것 같다. 나치에서 차곡차곡 승진한 대부분의 관료는 타인에게 편안한 죽음을 제공하는 일에 나름의 '배려'가 깃들어 있다고 느꼈다.
타인을 향한 배려가 양심을 위태롭게 할 리 없다. 배려를 느끼는 쪽으로 양심의 진로가 정해진다면, 가책을 느낄 이유도, 필요도 없다.
양심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단 한 번도 '아이히만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194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제노사이드 협약'에 따라 전 인류가 참여하는 국제형사재판소에서 "건전한 소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만큼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가 막중하다고 판단했다.
아렌트는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히만의 상투적 언변과 메소드 연기에 속아 넘어갔던 것이 아니라, 무죄를 호소하는 아이히만과 유죄를 공언하는 예루살렘 법정의 상호작용을 철저히 분석하는 가운데 양심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현상, 즉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자기 양심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삶. 세상 모든 사람은 그런 삶을 살고자 하며, 아마도 십중팔구는 그리 살고 있다고 자부할 것이다. 일부러 자기 양심과 불일치하는 삶을 계획하거나, 자아분열적 삶을 살고자 의도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합리화든 확증 편향이든 거짓말을 하든 변명을 둘러대든 핑계를 읇조리든, 사람들은 양심적으로 살고자 자기 나름대로 노력한다. 양심의 근거를 확고히 가지고 있다. 아이히만도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과 다르지 않은, 양심에 관한 노력과 근거를 지녔을 것이다.
공익과 공공성, 편파적이거나 공정하거나
나치에 부역한 공익 추구자들
나치 집권기 독일에는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건축가가 살았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친구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의 강력한 추천으로 군수장관이 되었다. 그는 건축이라는 공통된 관심사 덕분에 다른 측근들의 질투를 살 만큼 히틀러와 친하게 지냈다.
동시에 그는 히틀러 개인이 아닌 독일이라는 국가 공동체의 이익, 즉 공익을 위해 일하는 모습도 보였다. 실제로 슈페어는 독일을 승리로 이끌 효율적인 무기 생산 산업구조를 고민했다. 얼마나 열심히 고민했는지 하마터면 과로사할 뻔했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그가 히틀러 개인과 나치에 잘 보이기 위해 일했던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일까. 전쟁 직후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슈페어가 자기 자신을 '착한 나치'로 묘사하며 변호했을 때 효과가 있었다.
그는 히틀러의 최측근이었고, 침략 전쟁을 뒷받침하는 무기 공장을 진두지휘했는데도, 그것이 공익을 위한 임무 수행이었음이 인정되어 남들을 교수형을 선고받을 때, 상대적으로 가벼운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공익은 공동체의 이익을 가리킨다. 그들이 추구한 공익은 나치 독일의 공익이었으며, 그 내용인즉 히틀러가 선포한 영토 확장이었다. 자, 이제 공익의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 공익은 편파적인 것이다.
이 책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 수업"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열다섯 권의 핵심을 마주하고 함께 고민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난 10월에 읽었으나, 제가 게을러서 이제야 후기를 올립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양심"과 "공익"입니다.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 또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는데 기여한 사람에게도 "양심"이 있었습니다. "양심"이 없어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양심이 있어서 중대한 범죄를 더 수월하게 저지를 수 있었다는 한나 아렌트의 분석은 적지 않은 충격을 줍니다.
이는 현재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공직사회에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습니다. 헌법에서 허용하지 않은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과정에서도 그 주동자와 관여자들에게도 "양심"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문제는 그 "양심"이 주권자인 국민의 일반적 "양심"과 꽤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공익"도 주권자인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공익"과 꽤나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는 메시지도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공익"에 기반하고 있을 것입니다.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기 위하여 국회에 군대를 보내는 것도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공익"적 가치에 기반했을 것입니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공직자의 경우에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양심"이 삐뚤어진 것이 아닌지,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공익"이 그릇된 것은 아닌지 철저히 사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더 이상 "부역"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위 언론보도에서, 차출된 부대원 100명 전원은 지시를 받은 현장에 직접 들어가는 대신 선관위 인근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거나 주위를 배회하고, 다른 장소에서 대기하는 등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될 때까지 시간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 부대원 100명에게 "양심"과 "공익"은 어떤 의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