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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미 Jul 06. 2021

악의 평범성과 인간의 양심



악의 평범성이 나오게 된 배경

  

한나 아렌트 하면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얼른 연상할 수 있는 분들이 제법 많을 것 같다. 악의 평범성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영어로는 'the Banality of Evil'인데, ordinary 혹은 common이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banality에는 '진부하다'는 어감이 들어있다. 진부한 평범함, 흔해빠진 것. 그런 의미가 악의 평범성이 겨냥하는 뜻이다. 말하자면 악의 평범성은, 악을 대놓고 무시하며 깔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합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악은 특별하지 않다. 


아렌트는 명확히 말했다. 악에는 근본적으로 깊이가 없다! 선에만 깊이가 있다. 아렌트는 악이란 것을 의식적으로 평가절하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때까지 악을 가공할 만한 거대한 힘으로만 보려는 분위기가 만연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악을 이겨내기란 매우 힘들다"고 한탄하는 이들이 종종 발견된다. 아렌트는 그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렌트에 따르면, 악은 훌륭하거나 거대하지 않다. 악은 선의 결핍 혹은 부재다. 성 어거스틴의 신학적 견해와 상통한다.

따지고 보면, 사실상 인간이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은 악의 힘에 비해 인간의 선이 연약해서가 아니라, 그 인간 안에서 '진부함+평범함(banality)'이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부함과 평범함의 결합을 이룩한 사람은 결국 인간 자신이다. 자기 바깥에서 악이 들어와서 그것에 사로잡혔었노라고 악에게 핑계를 떠넘기고, 연약한 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건 술 때문에 성폭력을 저질렀다거나, 마약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것과 흡사한 방식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악은 인간 자신의 '순전한 무사유(thoughtlessness)'에서 출발한다. 무사유, 즉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은, 시험 치를 때 정답을 찾기 위해 정보와 지식의 관계를 골똘히 열심히 생각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악의 평범성이 지목하는 무사유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타인의 관점에서' 검토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전교1등을 놓치지 않다가 서울대 의대에 들어간 사람도 얼마든지 무사유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공교육의 혜택을 짧게 받았다 할지라도 충분히 사유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무사유는 학력과 무관하다.
 


  

예루살렘 법정(정의의집)에서 아이히만의 증언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예루살렘의 '정의의집' 재판 당시 이렇게 말하였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8쪽에서 읽을 수 있다.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아이히만은 존경스러운 인물 히틀러를 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존경하는 인물의 성품과 행동을 추종하듯. 존경하는 인물을 따라 자신의 행동을 삼가며 조심하는 것, 그것이 아이히만의 도덕성이었다. 그는 자신의 도덕과 양심의 방향을 히틀러에 고정시켰다. 거기에 변화를 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기자가 연필로 그린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 이인미


인간인 우리는, 성공한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끌린다. 성공한 히틀러가 주동한 나치즘은 언제나 '좋은 사회'를 제시했다. 더 나은 사회,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갈 동력이 히틀러와 나치즘에서 나오는 것같이 느껴지게 되었다. 그런 데다, 히틀러는 평화를 추구한다고 자주 공공연히 말했다.



평화로운 오베르잘츠부르크에 건립된 히틀러의 멋진 별장에는 날마다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에서부터 당대 유럽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정치인들까지···. 친위대의 멋진 퍼포먼스를 보며 별장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히틀러는 악인은커녕 거의 '친근한 정치인'으로 보였다. 히틀러가 풍기는 좋은 인상(?)은 심지어 국경을 초월했다. 영국 수상 체임벌린(A. N. Chamberlain)은 그 별장에서 히틀러를 만나고 나서 그를 괜찮은 사람으로 여겼다니.




양심인가? 동정심인가?



아이히만은 잔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착적, 가학적인 성격지향성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에겐 광적인 증오도 비열한 동기도 없었다. 변태도 사디스트도 아니었고, 거짓말쟁이나 허풍쟁이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열광적 악의 화신이 아니었다. 그는 말했다.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요컨대 그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  기자가 연필로 그린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 이인미



아이히만의 양심은, 유대인 대학살의 설계자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가 양심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힘러는 양심의 문제를 개인적 동정심의 문제로 주도면밀하게 치환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묻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라고 자문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즉, 인간사에 발생하는 선악의 문제와 인간다운 삶을 전체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나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동정심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집중하게 한 것이다.



이같은 치환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자기의 동정심 처리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면, 그 사람은 타인과 사회를 전체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양심의 작동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양심은 있으되 그 방향이 자기중심적이다. 자기의 동정심 처리에만 양심을 사용한다. 이런 방식의 삶에선, 결국 나와 동질적인 사람들 집단 안에서만 내가 괜찮은 사람이면 된다.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의 문제지점은 바로 여기다.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 내 행위 하나를 전체에 비추어 생각하지 않는 것! 모든 판단을 내가 존경하는 1인 혹은 의견이 균일한 동질적 집단에 맡기고 나는 안 하는 것. 그렇다면, 악의 평범성에 들어서지 않는 '비법'은, 딱히 다른 무엇이 아니다. 위의 내용을 반대로 뒤집으면 된다. 즉 자기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것, 자신의 행위를 전체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 스스로 판단하는 것! 아이히만의 삶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 말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지 않는 건 쉽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전체에 비추어 생각하는 건 간단치 않으며, 스스로 판단하는 것도 당연히 어렵다. 이 어려운 일들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감당하지 않는 일이 누구에게서나(전교1등이거나 아니거나,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아렌트의 요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악이 어떻게 하다 평범하게 되어가는지에 대한 일종의 과정설명서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을 밟을 것인가, 말 것인가. 아렌트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청한다.



* 함께 읽을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임과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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