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흘러간 대중가요가 있다. 완전히 흘러간 옛노래라고 하긴 어렵다. 1992년에 발표되었지만 몇 년 전 새로 리메이크되었을 만큼 오래도록 사랑받는 노래다.
이 노래의 화자는 남성이다(남자가수가 부름). 화자는 여성의 진심을 알고 나서 그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노랫말의 의미가 절묘하게 다가온다.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한 까닭이다.
우선, 화자가 그 여성과 연인이 되고 싶어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하자. 아직 두 사람이 연인관계에 들어선 게 아닌 걸로 보아, 현재상태는 양쪽 누구도 사랑을 고백하지 않은 시점이다. 요컨대 "오늘부터 1일"이라는 것이 선언되지 않은 상태로, 두 사람은 친한 친구로 지내는 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성의 진심이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지점에 있음을 화자가 알게 되었다. 그 즉시 화자 입장에선 그녀의 진심이 서운하거나 아쉽다. 왜냐면 그런 어중간한 감정은 아직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녀를 떠난다. 연인이 되지 못할 바에는 친구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모양이다.
다음으로, 위와 정반대의 경우를 상정해보기로 한다. 화자가 그녀를 여자사람친구로 대하며 가끔 연애상담도 청하는 '편한' 관계로 지내는 중이라고 설정해보자(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처럼).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진심이 '사랑보다는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감정상태라는 걸 화자가 알게 되었다. 이는 사랑 쪽으로 진전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짧게 만났을 뿐인데도 그녀가 사랑 쪽의 가능성을 이미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화자 입장에선 부담스럽고 어색하다. 아직 사랑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어중간한 관계를 무심코 지속하다가는 그녀가 사랑 쪽으로 진전할 수 있으니 조심스러워진다. 그래서 화자는 그녀를 떠난다.
물론 이 노래를 들을 때 전자의 상황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 보인다. 하지만 후자의 상황도 우리가 현실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으며, 실제로 이 노래를 들으며 과거 어색했던 관계를 추억하는 이들도 드물지 않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노랫말의 한 대목('이 세상 누구보다도 널 아끼는')을 들을 때 뜨거운 사랑을 떠올릴 수도 있고, 따뜻한 우정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책 <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에서는 의도적으로 후자 쪽 상황을 환기한 바 있다. 즉, 우정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화자가 상대의 진심(연인관계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놓음)을 확실히 알게 되자, 그 어색함을 견디기 어려워 그 곁을 떠난다는 해석을 붙여본 것이다.
▲ 사랑과 우정 사랑 혹은 우정
ⓒ Pixabay (무료 이미지)
그건 그렇고, 동성이든 이성이든 모든 인간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랑과 우정에 대하여 대다수 사람들은 한 마디 이상의 이야깃거리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사람의 진심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어느 한쪽으로 확 쏠려있으면, 상황이 보다 더 간단명료하게 정돈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위 노랫말에서처럼 사랑과 우정 사이에 애매하고 엉거주춤하게 걸쳐있는 심리상태를, 아마 불분명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우정과 사랑을 무슨 기준으로 나누면 좋을까? 무엇이 우정이고 무엇이 사랑인가? 무를 반으로 자르듯 두 개의 '가치'를 나눌 수 있을까? 이 물음들에 대하여 정확하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깔끔하게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나 아렌트도 우정과 사랑을 분간하고자 시도한 사람 중 하나였다. 아렌트는 정치사상가답게 '공적 영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우정과 사랑을 구분하였다. 아렌트는 공적 영역(정치적 영역)을 제시한 다음, 그곳에서 우정은 출현하나 사랑은 소멸된다고 보았다. 아렌트가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때 우정은 '정치적 존경'의 의미를 품는다.
심지어 아렌트는 본격 정치이론서 <인간의 조건> 한 귀퉁이에 "사랑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마세요.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써두었다. 물론 아렌트는 사랑을 금지하지 않았다. 사랑을 멸시하지도 않았다. 아렌트는 사랑이 '무세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세계사가 어떻게 돌아가든 그것에 살짝 무심해지면서 두 사람의 연애현실에 초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파트너와의 밀접한 합일을 간절히 원한다. 그들은 두 사람 사이에 '틈'을 허용하고 싶지 않은 심정을 갖는다. 아렌트는 그 '틈'을 공적 영역의 중요한 속성으로 본다. 그 '틈'을 아렌트는 'in-between'이라는 용어로 불렀다.
'in-between'은 사람들끼리 가까이 존재하며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면서도, 너무 밀착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아끼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거리를 가리킨다. 사랑에서는 이 '틈'이 좁아지거나 아예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이 아렌트의 견해인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연인간의 사랑에도 두 사람 사이에 '틈'이 과연 없는 게 최상의 상태인가에 대하여 이견을 보이는 이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랑은 파트너와의 합일을 원하며, 그 방향으로 매진한다. 하지만 그런 사랑만이 사랑의 전부일까?
아렌트의 첫 책이자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멋진 책을 꼽으라면 <인간의 조건>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가 원래 붙이려고 했던 제목이 아니다. 아렌트는 "세계사랑(Amor Mundi)"이라는 제목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제 필자는 다음 글에서, 정치와 사랑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할 의무감을 (자발적으로) 느낀다. 아렌트의 박사학위논문이 "성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이었으니, 명색이 [한나 아렌트의 정치개념 말모이]를 표방하는 글이 사랑을 사실 그냥 넘겨서는 안 되리라. 이렇게 단 한 편의 글로 종결지을 수 없을 만큼, 정녕 위대한 개념이자 인간의 실제현실이 곧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