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영역에서 사람들이 다루는 이슈가 모두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공적 영역에서 이야기되는 논쟁들 중에서 조금만 내부로 들어가보면 결국 경제적인 것이 중앙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사례들이 제법 많다. '따지고 보면 밥그릇 싸움'인 경우가 그렇다. 물론 경제를 아예 표면에 내세운 이슈들도 많다.
그러면 경제와 정치는 어떻게 구별되는 걸까? 경제는 돈과 관계돼있고, 정치는 돈과 관계돼있지 않은 것, 이렇게 간단히 분류하면 될까?
정치사상가 아렌트에 따르면,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치는 공(public)이고, 경제는 사(private)다. 정치는 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인간활동을 가리킨다. 반면 경제는 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활동을 말한다.
사적 영역은 영어 문자 그대로 볼 때 '박탈된(deprive)' 상태를 기본의미로 지닌다. 무엇이 박탈되었나? 공적인 것이 박탈되었다. 공공으로 드러난다는 바로 그 속성이 박탈된 영역이 사적 영역이다. 흔히 우리는 '프라이버시(privacy)를 침해하지 말아달라'는 표현을 대하곤 한다. 남들에게 공공연히 알려질 필요가 없는 것, 드러낼 의무가 없는 프라이빗한 것, 그것이 프라이버시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있는 곳? 거기가 사적 영역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대표적인 사적 영역은 가정이다. 가정은 그리스어로 오이키아(oikia), 그리고 가정을 잘 관리하는 것은 오이코노미아(oikinomia)다. 이 오이코노미아가 이코노미(경제, economy)의 어원이다.
반면, <한나 아렌트의 정치개념 말모이 1편>에서 확인했듯, '정치'라는 단어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polis)다. 폴리스는 가정의 전적인 희생 위에 이룩됐다. 폴리스에서 여성과 노예는 기본적으로 배제되었다.
폴리스는 당대 자유로운 남성들만의 집회였다. 집안을 유지, 건사하는 일로 통칭할 수 있는 경제활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겨 자기는 자유로워진, 다시 말해 경제활동과는 무관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귀족과 양반 남성들은 경제활동보다는 책 읽기, 글짓기, 서원이나 향교 등에 모여 대화하거나 술 마시며 놀기 등에 참여했다. 집안을 유지, 건사하는 일-경제활동은 여성과 노예들이 감당했다. 귀족과 양반 나으리들은 노동도 하지 않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참여자들 개인의 프라이버시, 즉 집안사정이 드러나지 않아도 되는 공적 영역-폴리스를 술 마시며 노는 공간이 아니라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경제활동과 그 수준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혹 알려진다 해도 각 개인들의 동등한 표값과는 무관했다는 점에서, 폴리스 안에서는 모두 평등할 수 있었다.
경제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 보전하는 일에 직접 가담하고 참여하는 활동이다. 요컨대, 경제는 먹고살기 위한 활동, 즉 노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사적 영역에 연관되어있다. 역사적으로 가정은 경제활동의 중심이자 주무대였고, 가족구성원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목적에 복무하는 생계의 주축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가정 경제활동의 면면이 공적으로 드러나있다. 아렌트의 표현으로 하면, "가정과 가정경영이 공론 영역의 사안이 된" 것.
그리 되어가는 과정에 사회적 영역이라는 것이 개입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사회적 영역이 생겨나고 넓어지면서 공적 활동(정치)과 사적 활동(경제)이 사회적 영역으로, 사안별로 헤쳐모일 수 있게 되었다. 아렌트는 사회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다만 살기 위해서 상호의존한다는 사실이 공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단순한 생존에 관련된 활동이 공적으로 등장하는 곳."
이 같은 사회적 영역이 개입되자, 현대인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단호한 구분을 조금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경제 이슈를 공적으로 다룬다. 그래서 경제가 모두의 공통 관심사인 듯 보이고, 때로 그게 공적 영역에서 이룩되어 마땅한 정치활동인 줄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그리고 사회적 영역에서 어떤 활동들이 일어나는지, 그 차이를 사실상 머릿속으로는 섬세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가 시작되고 햇수로 2년이 지나도록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가 말 그대로 생활지침이 되었다. 영국 NHS(National Health Service, 일반재정 보건의료체계로서 세계최대의 기관)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To stop the spread of coronavirus(COVID-19), you should avoid close contact with anyone you do not live with. This is called social distancing. 코로나19 확산을 멈추게 하려면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든 가까이 만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의미입니다. [www.nhs.uk 홈페이지]"
동거하는 사람 (대부분 가족) 아닌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만나지 않는 것을 왜 공적 거리 두기(public distancing)나 정치적 거리 두기(political distancing)라고 정의하지 않았을까? '공적≠사회적'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사적 영역인 가정 안에서까지 엄밀히 준수돼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사적≠사회적'도 아닌 것이다. 이제, 사회가 어떻게 사적 영역 및 공적 영역과 겹치면서도 다른 영역을 가리키는지 훨씬 명확해졌으리라.
대한민국의 경우, 현재 예산추경을 해가며 재난지원금(제5차?)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사적 영역(경제)을 살리기 위한 국가적 방책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일부 국민들은 나라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마스크를 쓰고서 '기를 쓰고' 모인다. 사회적 거리를 감안해 최소한이라도 모인다(지난해 8.15광화문집회는 예외일 수 있음, 그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확진자가 늘어났음).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각종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온라인에서 모인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가능한 방법을 활용해 사람들은 모인다. 모임이 끊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뿐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은 모임 자체를 절연하지 않는다.
왜일까?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은, 인간이 모이는 것 자체를 누구도 '절대금지'할 수 없다. 그렇게 금지해서 금지될 사안이 아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바로 행위, 즉 정치에 걸려있는 까닭이다. 목숨이 붙어있다면, 바야흐로 코로나 창궐시대를 '생존자'로서 통과하면서 조심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행위하고 싶어한다. 산소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 내뿜으며 대화도 움직임도 없이 그저 홀로 호흡만 유지하는 삶을, 우리는 바람직한 인생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를 할 수 있어야, 즉 '정치할' 수 있어야 산다. 타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때라야, 산다. 공적 영역이 있고 거기 진입할 수 있어야 말 그대로 '사는 것같이' 산다. 그런 의미에서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라든가, '빵보다 자유를'이라는 표현은, 다만 고상한 혹은 우아한 수사(rhetoric)가 결코 아니다. 인간적 본성을 지닌 존재가 정치(공적 영역에의 참여)를 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지극히 존재론적인 표현인 까닭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거기 있음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행위함(말을 포함함)으로써 서로에게 '나 여기 있소'하며 자기가 남에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존재다. 동시에 남들이 거기 잘 있는지도 알고 싶어하는 존재다.
인간에게 '공(public)'은 '사(private)' 못지않게 중요하다. '배고프지 않게 먹고살 수 있으면 됐지?' 그 정도에 인간은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참에 우리는 우리 본성을 잘 들여다보며 한 번 더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가 대개 정치보다 경제에 더 마음을 쓰고 있고 그리 되기 쉽지만, 그것만이 인간 존재의 전부는 아니며, 그것만이 관심사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