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논란이 활발(이라 쓰고 '격렬'이라고 읽음)하였다. 행정수도 이전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히 뜨거운 감자다. 지난해엔 바야흐로 위헌이라는 의견까지 제안되었으며, 제기될 때마다 언제나 찬반이 대단하다.
행정수도 관련 갑론을박은 비단 2020년 올해가 최초는 아니다. 15~16여 년 전에도 한 차례 있었다. 그뿐 아니다. 그보다 더 전에, 즉 유신시대 말기엔 이 논의가 국가 관료조직 차원에서 (공청회 같은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비밀리에 실행 직전까지 진행된 바 있었다.
▲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 KBS다큐멘터리 "역사스페셜" 캡처화면
그런데 위로부터의 개혁에 능한 '박정희 각하'도 명령 한 마디로 행정수도를 옮기겠노라 선언하진 못했다. 쓸어버리고 밀어버리는 식의 폭력을 사용했던 사람이었지만, 또 체육관 선거라는 요식적 절차를 통해 대통령 직을 유지한 사람이었지만, 그 또한 권력의 자장 안에 있어야만 했던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권력이 폭력을 자제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또다른 절대군주(파라오/왕/황제)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권력은 흔히 '강한 것(strength)' 같아 보인다. 그러나 강한 성질 자체가 권력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강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는 사례가 물론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강성=권력'은 아니다. 강성이 권력의 필수요인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슈퍼맨, 원더우먼, 스파이더맨 같은 사람들은 강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강자이긴 하나, 권력자는 아니다.
한편 권력이 '힘' 혹은 '강제력(force)'의 의미로 이해될 때도 있다. 이때 강제력은 그리하려는 의지, 의도, 동기가 없는 사람에게 특정한 말과 행위를 시키는 것을 뜻한다. 강제력은 복종을 야기한다. 그런데 억지로 복종을 강제하는 사람은 반항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강한 사람이 부러움·우러름을 받는 것과 대조적이다.
마지막으로 권력은 '권위(authority)'와 유사한 모양으로 나타날 때가 종종 있다. 그 앞에 서면 '작아지는' 느낌이 들어, 공손히 머리 숙이게 되는 것이 곧 권위다. 권위자는 강압적이지 않다. 복종을 강제하지 않는다. 자발적인 듯 비자발적인 추종, 비자발적인 듯 자발적인 순종, 그것이 권위자 근처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하나의 집단 및 공동체가 권력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며 공유하느냐에 따라 거기 있는 권력의 양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만일 권력을 강성 또는 강제력으로 이해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자기 힘을 최대한도로 키워 남을 복종시키는 데 활용하는 사람에게 권력을 모아줄 것이다. 권력을 권위로 이해하는 공동체에서는 권위자에게 권력을 부여할 것이다. 그렇다. 권력자는 권력을 산출하는 사람이 아니라, 권력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권력은 개인이 혼자서는 생산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권력과 폭력(violence)의 관계는 어떠할까? 먼저 권력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아렌트에 따르면, 권력은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사람들 사이에 자유롭게 발생하는 역동적 현상' 그 자체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폭력은, 위와 같은 의미의 역동성, 다시 말해 '권력'을 파괴하고 훼손하는 현상을 뜻한다. 폭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발생하는 다채로운 언어와 각양각색의 행위가 성가셔서 '한 가지였으면 좋겠다'고 소망할 때 발발한다. '딴 소리, 군 소리 없이 좀 고요하면 좋겠다'는 생각 위에서 폭력은 확장된다.
폭력은 고요함, 적막함을 목표로 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놀리는' 입을 틀어막는 게 폭력이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이거나 흩어지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게 폭력이다. 사람들 말소리가 없고 움직임이 저조해서 고요하고 적막한 곳, 거기가 폭력세상이다. 요컨대 폭력은 권력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의견이 주장되고, 지지가 발생하고, 반론이 제기되는 등 소란스러워지지 않도록 조절한다. 자유롭고 시끄러운 민주적 의사소통 분위기를 훼손하는 물리적·심리적·사회적 힘, 그것이 폭력이다.
누구든 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권력의 요소로서 '지지'를, 최소한일지언정 반드시 확보하고 있어야만 한다. 아주 소수 측근의 지지일지라도 그것이 있어야 그 사람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지지가 없으면 권력도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권력이 폭력으로 교체되고 변질되는 전환점이다. 지지가 약하다고 느낄 때에, 또 실제로 지지가 줄어드는 때에, 권력자는 폭력 쪽으로 눈을 돌린다. 이윽고 폭력이 출현한다. 나아가 극단화된다. 이런 불행한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은 '권력=폭력'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권력이 강할 때 폭력이 강한 게 아니라 권력이 약할 때 폭력이 강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박정희정권 시기에 한국엔 폭력이 성행했다. 초기보다 말기에 더 폭력이 극성을 부렸다. 시간이 갈수록 박정권 권력이 강해진 탓이었을까? 아니다. 그 반대였다. 고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는, 폭력의 반의어로서 권력(폭력에 반비례하는 권력)의 의미를 '환기하는' 사뭇 웅장하고 비장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이 지지를 통해 유지되지 못할 때, 즉 권력이 흔들리거나 취약할 때, 폭력이라는 수단이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폭력은 '수단' 혹은 '도구'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며(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목적으로 수긍될 수도 없다.
폭력이 도구적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폭력이 인류역사에서 때때로 아슬아슬하게 '찬미받을 만'한 것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아렌트의 분석이다.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할 때, 백성들이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맞서 총칼로 싸울 때, 제2차세계대전을 핵폭탄 투하로 중지시킬 때,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관공서 점거와 공공기물 파괴를 감행할 때 등등···.
인류는 폭력을 행사해 새 시대를 열기도 했고, 폭력을 행사해 더 큰 비극을 막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폭력은 정당화되곤 했다. "폭력이 불가피했다"는 주장도 수긍됐다. 기자가 <한나 아렌트의 정치개념 말모이 06편>에서 폭력예찬자로 주요하게 언급했던 사르트르, 파농 같은 철학자들이 아무런 검토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폭력을 예찬(이라 쓰고 '정당화'라 읽음)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단, 아렌트는 폭력에 대해서만큼은 예찬은 물론이거니와 정당화조차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