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필로 그린 안중근 의사
ⓒ 이인미
일제 강점 말기, 대한민국 광복군은 항일무장투쟁을 기획하고 실천했다.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이 일어났다. 그 전투들 안에서 아군과 적군은 죽고 죽이는 폭력을 서로 주고받았다. 한편 일제 강점이 본격화되던 거의 초기 무렵,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쏘았다. 총성이 울릴 때 이토는 하얼빈 역의 어느 한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폭력적 지배에 대항하는 폭력적 저항. 우리는 대체로 이 두 폭력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폭력적 저항, 방어적 폭력에 대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든가, 나아가 '정당했다'라고 평가한다. 법률용어로 정당방위(self-defense)라는 말도 있다.
이같이 폭력을 평가하는 과정에는 폭력의 속성 두 가지가 주효하게 개입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폭력은 합리적 해명(정당화)과 같이 간다. 둘째, 폭력은 짐승 같은 게 아니다.
폭력은 언제나 그것 자체로 목표가 아니고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당성을 얻는 사례가 종종 있다. 비근한 예로,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부장이 술자리에서 박정희 '각하'에게 총을 쐈다. 박 전 대통령은 사망했다. 그 폭력적 총격사건으로 인하여 폭력적 유신정권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당시 재판기록에 의하면, 김재규가 그 같은 살인(폭력)을 자행한 목표는 '혁명'이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듬해 봄을, 그때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우리는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바야흐로 유신정권이라는 겨울왕국이 지나가고 새 봄이 새 싹처럼 움틀 것 같은 시절이었다(허나, '서울의 봄'은 진압당했고, 박정희정권 못지않게 폭력적이고 무식한 전두환정권이 들어서게 되었지만). 따라서 어떤 이들에게 김재규의 행위는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한 평가내용을 합리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폭력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무엇을 목표로 했고, 정작 무엇을 초래했느냐에 따라 그 폭력은 '가치(?!)'를 평가받게 된다. 폭력이 나타나면, 폭력의 맥락을 합리적으로 잘 살피고, 폭력의 여파를 이성적으로 잘 관찰하여, 폭력의 전개과정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는 일들이 뒤따를 수 있다. 이름하여 '폭력이라 해서 다 같은 폭력은 아니다'라는 논리가 인류역사를 통틀어 폭력이 나타난 이래 오래도록 수긍되어왔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폭력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구분, 분류, 평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허나, 폭력은 짐승 같은 게 아니다. 동식물 생태계의 거대한 먹이사슬 구조를 따라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장면을 폭력으로 개념정의하는 것은, 폭력 안에서 합리성을 따지고 싶어하는 인간적 관점에서 나온 의견이라 할 수 있다.
폭력은 짐승 같은 게 아니라는 메시지는 다소 낯선 감이 없지 않겠지만, 이는 폭력이 정당화 논리를 언제나 취하려 하며 폭력에 관한 한 이성적 설명이 자주 시도된다는 속성과 오히려(!) 통일성을 이룬다. 그런 데다, 이 아이디어는 비단 아렌트 한 명한테서만 발견되는 것만도 아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아렌트의 <폭력론>보다 다섯 배쯤 두꺼운 책 <파괴란 무엇인가?>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상당히 자세하게, 인류학과 사회심리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연구결과들을 근거로 하여 주장한 바 있다.
인간의 행위를 관찰한 정치사상가와 인간의 내면을 관찰한 정신분석가의 공통된 결론이 '폭력은 짐승 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우리는 잘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폭력은 인간의 이성이 다루는 정치적 주제들 중 하나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활동 중 하나다. 더불어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다. 동물들의 먹고 먹히는 행위가 만일 폭력이라면 그 폭력은 자연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유지하려 할 뿐 파괴하지 않지만, 인간의 폭력은 인간사회뿐 아니라 바야흐로 '인간 실존의 조건'인 자연환경과 지구 생태계까지 파괴하는 수준에 이미 이르러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