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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운엽 Jun 25. 2024

유서 깊은 리비아의 마사 엘 브레가 항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배 몇 척이 겨우 접안할 수 있는 작은 항구 마사 엘 브레가 항에서 비료 포대가 컨베이어로 해피 라틴 호 선창에 쏟아지고 있다.

선창 안에서 인부들이 가지런히 쌓는다.

상륙 나가려다가 화물 선적을 진두지휘하는 일항사와 데크에서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어이, 국장님, 밖에 뭐 볼 거 있어요?"

"에이, 쵸사님, 사막에 뭐 볼 거 있겠어요. 언제 여기 다시 올지 모르니 사진도 찍고 가슴에 담아 두는 거죠."

내 대답에 일항사가 말했다.

"서베이어가 그러는데 여기가 2차 대전 때 군수 하역항이었대요. 탱크도 내리고 보급품과 군인, 상인들이 북적댔다네요."

"그래요? 지금 부두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아~ 어제 저 사막 한쪽에서 본 게 탱크 바퀴 자국이었나?"

"하하하~ 뭔 탱크? 사막에서 수십 년 된 탱크 자국이 남아있겠소? 천생 국장님은 개그맨으로 나가든가 해야지 입만 벙긋하면 만날 뻥이셔. 혹시라도 바다에 빠지면 주디만 뜨겠소."


승승장구하던 독일의 롬멜 장군이 본국의 지원군과 보급을 받지 못해 고전하던 중 리비아의 브레가 항에서 전차와 보급 물자를 받았다고 한다.

'HAPPY LATIN' 호가 지금 화물을 싣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말이다.

브레가 항이 작지만, 역사가 있는 항구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승자들이 쓴 역사이기에 실제와 다르게 왜곡된 게 많이 있을 것이다.

영미권이나 일본 책만 번역하고 공부한 경우에는 더 그렇다.

또 적장의 업적은 우리 편 군의 치욕이 될 수 있다.

롬멜 장군도 그런 경향이 많은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롬멜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가장 유명한 독일군 원수 중 한 명이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경호 대장으로 근무한 최측근이었고, 이후 출세 가도에 올랐다.

대전 당시 기갑사단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전선에서 전격적으로 아르덴 숲을 돌파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독일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어 능수능란하게 지휘하여 적과 아군 모두로부터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원래 1차 세계대전에 하사관으로 참전한 히틀러는 귀족 출신에 엘리트 코스를 밟아 진급한 기존의 장교들에 대해 열등감과 반목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심복인 SS 출신의 장교들을 믿었고, 롬멜에 대한 총애는 각별했다.


롬멜 원수가 아프리카에서 세운 전공에는 논란이 많았다.

애초에 동맹국 무솔리니가 사고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리비아에 끼어들게 된 것이라 독일 지휘부 방침은 현지의 이탈리아군을 도와 리비아만 지키라고 했다.

당시 독일은 2차 대전의 승패가 달린 동부전선에서 소련과의 전투에 전력투구하는 전황이라 북아프리카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롬멜이 전진하여 계속 승리하자 국가전략이고 뭐고 일단 이기면 좋아하는 히틀러는 지원은 안 해주고 롬멜이 이집트까지 점령해 주길 바랐다.

결정적으로 그의 전공의 상당 부분이 철저한 전장 파악과 체계적인 계획으로 한 것이 아니고 즉흥적이고 임기응변에 따라 지휘한 것이라 재수 없으면 참담한 패배로 이어질 수 있다.


보급 문제도 아프리카 전선의 엄청난 거리가 발목을 잡게 된다.

영국군이 퇴각하고 어쩌다 남은 군수물자를 득템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무리한 진격을 거듭하여 최대의 약점이었던 보급선이 길어져 항상 보급품과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 해군을 돌파해서 간신히 화물을 항구에 내려도 전선까지 수천 km가 넘는 거리를 오로지 트럭으로만 수송해야 하고 여기에 더해서 심심하면 영국 군과 군에게 공격받는 해안도로 한 개뿐이었다.

병사들이 뭘 먹고 싸우고, 탱크는 기름과 포탄 없이 어찌 움직이냐고...


여기에 적국의 장군을 추어올려 자신들의 패배를 희석하고자 했던 영국의 의도적인 롬멜 띄우기가 한몫해 그의 명성은 실제 전과보다 과대하게 포장되었다는 논란도 있었다.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의 의회 연설 일부다.

"이 전쟁의 참상과 상관없이 개인적 평가를 해도 된다면, 나는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2차 대전 중 연합군이 합류하기 전 몽고메리 장군 등 영국 육군 단독으로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 건 롬멜과의 북아프리카 전쟁이었고 영국군은 졸전을 거듭했다.

자국군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는 적군 장군을 더 높게 평가하는 건 당연하다.


어쨌든 그의 군사적 직관이나 야전에서의 전투 능력 등을 보면 롬멜이 훌륭한 지휘관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롬멜이 전선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지중해를 거쳐 오는 독일의 보급선들은 영국 지중해 함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미 동부전선에 전투가 시작되어 물자가 부족해진 독일이었기에 전략적 가치가 적은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의 물자 지원 요청을 빈번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롬멜은 전선을 넓히는 것이 바보 같은 짓임을 알고도 물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카이로를 점령하여 군수품을 확보하려고 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슈파이델 장군이 롬멜에게 히틀러를 암살하자고 제의했었는데, 게슈타포가 반역자들을 체포할 때 슈파이델도 역시 잡혔다.

그때 롬멜은 총통에게 슈파이델이 좋은 사람이며 결백하다는 편지를 썼다.

히틀러는 그런 편지에 롬멜도 같은 놈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도 히틀러는 마지막으로 롬멜에게 기회를 주고자 베를린으로 불렀다.

그에게서 직접 결백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롬멜은 가지 않았고 며칠 후 그는 무장 SS 12명의 포위하에 권총과 청산가리 중 고르라고 해 약을 먹고 유명을 달리했단다.

많은 독일인이 영웅 롬멜의 사망을 애도하였으나 정작 히틀러 측근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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