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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성극 아카이브 Nov 04. 2019

뮤지컬 아가사 - 2

죽음에 대한 애도. 그 후의 공포 /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재차 얘기하는 지점이지만, 아무리 레이몬드의 서사를 잘 구축했더라도 복잡한 타임라인과 공간의 이동이 주는 혼란은 분명 존재한다. 다만 높게 평가해야 할 점은 이러한 패널티를 안고서도 아가사를 캐릭터를 복합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서사를 축소하지 않았다. 또한 무대장치와 넘버로 최대한 설명을 하려고 노력했다. 복잡한 상징과 서사를 관객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아가사>는 넘버와 무대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문은 미궁으로 가는 입구이자 출구, 단 하나의 출입문이다.

  무대장치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무대 한가운데에 위치한 ‘문’이다. 레이몬드가 있는 현실 속 공간이 아니라 아가사와 로이의 공간에서 문은 미궁으로 가는 입구이자 출구, 단 하나의 출입문이다. 「독 vari」 넘버에서 로이가 아가사를 괴롭혔던 모든 등장인물을 살인할 때, 1막 화려한 가면 넘버에서 가면 속에 갇힌 아가사를 구하러 들어올 때, 마지막으로 로이의 퇴장 장면에서 모두 이 문이 쓰인다. 아가사가 자신이 받는 압박을 견딜 수 없을때 문은 열리고 괴물이 등장한다. 반대로 아가사가 ‘스스로를 죽여봤다.’고 표현하는 장면, 즉 괴물의 죽음에서도 문은 다시 열린다. 로이와 아가사가 있는 공간에서 이 문을 드나드는 사람은 오직 둘 뿐이다.

  레이몬드가 있는 공간에서도 문은 잘 사용되는 무대장치가 아니다. 경감이 아가사 저택,  즉 밀실 안으로 들어올때나 문은 활짝 열린다. 그리고 뒤이어 낸시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 둘은 아가사가 직접적으로 살인을 원하는 인물이 아닌 외부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문 있다는 말이다. 아가사에게 동기를 제공한 네 명의 공간 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면 아가사의 저택이 곧 사건의 현장이며, 거대한 미궁이기 때문이다.「클로즈드 서클」 넘버의 시점부터 아가사의 저택 자체는 커다란 미궁이 되어 아가사의 동기를 쫓아간다.  그리고 이 안에서 다시 각자의 괴물, 즉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안에서도 역시 경감을 도와주는 조력자이면서 사건을 가장 잘 풀어나가는 붉은 실의 역할은 레이몬드가 맞게 된다.


  무대가 아가사의 서사를 잘 뒷받침해주고 있다면 아가사의 넘버는 서사 그 자체이다. 모든 넘버는 직설적으로 아가사에서 사용된 메타포와 상징의 의미를 넘버 가사로 풀이하고 있다. ‘독 가장 특별한 살인 어쩜 힘없는 약자들의 칼.’ ‘내 안의 괴물을 만나지.’ ‘라비린토스 삶과 죽음의 경계.’같은 가사들이 그렇다. 이렇게 가사에 직접적인 풀이가 드러나도 많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상징들이 복합적으로 겉면의 스토리와 잘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가사는 독을 쓰는 추리소설 작가고 독에 관심이 많으니까, 레이몬드라는 아이에게 추리소설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미궁이라는 비유를 들었으니까, 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사>는 겉면의 서사만 따라가도 충분히 재미있는 뮤지컬이 됐다.





베스역의 한세라, 낸시 역의 박서하

아가사를 이해할 수 있는 넘버. 「나비의 꿈」


  <아가사>의 넘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넘버가 있는데 바로 「나비의 꿈」이다. 아가사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함께 부르는 곡이다. 하녀 베스와 낸시의 관계를 은밀히 보여주는 넘버면서 아가사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넘버이기도 하다. <아가사> 뮤지컬 전체에서 아가사의 아이나 부모에 대한 얘기는 일절 나오지 않는다. 현 시간의 중년 아가사가 현재 받는 압박에 대해서 애기한다. 이렇게 보면「나비의 꿈」은 다른 넘버와 결이 맞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나비의 꿈」의 쓰임은 두 가지이다. 일단 베스의 딸이 낸시라는 게 근본없는 반전이 되지 않게 한다. 이건 베스라는 캐릭터의 서사를 구축하는 일이다. 두 번째로는 아가사의 서사를 보충해주는 역할이다. 이 후반부의 역할 때문에 「나비의 꿈」은 재연까지 중요하게 쓰였다.

  아가사의 「꿈 속으로」라는 넘버에서는 이런 가사가 있다 ‘그때가 생각나 어릴 적 재잘대던 시절 언제나 말을 들어주던 엄마 가족들 새끼 고양이도 내 얘길 들었어.’ 아가사가 살인 이야기를 쓰기 전, 즉 가장 행복했던 때를 얘기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건 아가사의 꿈 속과 연결 된다. 사람들을 모아서 즐거운 티 파티를 여는 것. 현실에서의 티파티는 전혀 즐거웠지 않더라도 말이다. 마치 어린 시절처럼 모두가 아가사의 이야기를 듣는 티파티를 아가사는 꿈속에서 이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가사의 꿈속에선 늘 괴물이 나오고 사람들은 도망치고 행복한 꿈은 곧 악몽으로 변한다. 아가사 내면의 괴물이 미궁의 문을 열고 나오려고 할 때부터 아가사는 악몽을 꾸고 더는 꿈속에서도 행복한 티타임을 갖지 못하게 됐다.


  「나비의 꿈」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엄마, 엄마. 사랑하는 엄마. 난 오늘 밤도 미궁을 해매요. 엄마, 엄마. 나를 도와줘요.’ 아가사는 미궁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대상으로 엄마를 지목한다. 아가사와 엄마의 관계는 극 중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비의 꿈」의 구성으로 우리는 아가사와 엄마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다른 관계를 찾을 수 있다. 바로 베스와 낸시이다. 베스는 낸시를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하며, 아직 작고 어리기에 보호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맹목적인 사랑과 보호, 그리고 다르게 살 거라고 말하는 낸시의 관계는 단순히 이 둘의 관계만을 설명하는 것에서 나아가 극 중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아가사와 그녀의 엄마와의 관계까지 유추할 수 있게끔 한다.

사진은 소극장 아가사

  그런 아가사의 엄마는 이제 아가사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아가사가 의지하고 아가사를 맹목적으로 보호해주던 단 하나의 인물, 아가사의 엄마가 떠나고 아가사는 약해졌다. 그 일말의 상태를 비집고 아가사가 평생 눌러 참아왔던 아가사의 독, 로이가 튀어나온다.

  「나비의 꿈」 후반부에서 베스는 ‘자 이제 훨훨 날아가’라며 낸시의 행복을 빈다. 그 구절에 아가사는 코러스를 넣는다. 정확히는 ‘날아가’라는 가사에 아가사의 코러스가 들어간다. 이 말은 어머니를 부르는 말이다. ‘날아가’라는 가사는 베스에게는 이제 둥지를 떠날 때가 된 낸시에게 하는 말이고, 아가사에게는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간’ 엄마를 기리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보고 싶어.’라고 아가사는 덧붙여 말한다. 떠나간 자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와 연관 지어 아가사가 붙잡고 있던 ‘둥지’ 도 사라졌다.  ‘행복했던 나날’에 대한 추억과 어렴풋한 기대도 같이 떠나간 것이다. 꿈속의 티타임은 다시 행복해지지 못한다. 엄마와 새끼 고양이가 아가사의 말을 들어주던 그 시절도 돌아오지 못한다. 아가사는 ‘날아가’라는 가사로 어머니에 대한 애도를 끝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애도는 이루어냈으나 그 후 아가사는 공포감을 느낀다. 그리고 애도의 완결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 즉 영원한 내 편을 상실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건 아가사에게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나는 악몽을 꿔요. 늙고 병든 여자. 자신의 책에 파묻혀 증오와 복수로 썩어가네.’ 아가사는 자신이 로이, 즉 미궁 속 독을 혼자서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것을 마주하는 것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혼자 늙어가고, 자신의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을 미래는 아가사에게 공포로 다가온다. 엄마에게 하는 말인  ‘당신이 보고 싶어’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유일하게 아가사를 이해했던 엄마가 떠나가고 아가사는 이제 미궁 속의 독을 혼자서 온전히 마주해야한다는 것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어하셨어요.’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괴로움이 아니다.


  곡의 배치 또한 눈여겨봐야 한다. 「나비의 꿈」은 2막 처음에 등장한다. 1막 끝을 화려한 꿈으로 끝낸 뒤 아가사가 로이의 손을 잡고 결국 로이가 우위에 선 후에, 관객들은 15분 휴식을 가진 뒤에 처음 만나는 넘버가 「나비의 꿈」이다. 레이먼드의 시점과 아가사의 시점을 교묘하게 연결하는 넘버이면서, 아가사 내면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넘버다. 로이가 튀어나오게 된 이유 아가사가 결국 티타임을 실행시키기로 마음먹은 이유에 엄마의 죽음이다. 아가사가 평생 참아오다가 결국 자신 안의 독을 꺼낸 시기. 그것에 대한 설명과 이유가 나비의 꿈에 모두 담겨 있다.




 뮤지컬 <아가사>라는 공연의 힘


 <아가사>의 공연 전체 구성과 서사는 모두 아가사를 중심으로 모인다. 그리고 아가사를 중심으로 독과 붉은 실, 즉 로이와 레이몬드가 배치 된 구조이다. 아가사의 후반부에서 아가사는 발견 직후 남편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 때 아가사는 이렇게 말한다 '안녕 내 작은 탐정, 이제 각자의 미궁 속으로 모두 돌아가.' 이 말은 아가사를 괴롭힌 모든 것들에 대한 말이다. 또한 이제 아가사는 미궁 속 무언가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신 안의 괴물을 죽여본 아가사는 이제 내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사는 말은 명령처럼 들린다.

  노년의 아가사는 행복해 보인다. 아가사는 로이를 죽여봤다고 말하지만 로이는 죽지 않았다. 다만 아가사는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을 깨달았다. 자기 내면의 괴물을 마주하고 그걸 오롯이 다스릴 줄 알게 됐을 때 아가사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자기 자신에게서 말이다. 미궁이 더 이상 미궁이 아니게 됐을 때 아가사는 온전하다.


  이 뮤지컬은 결국, 아가사가 겪은 시련과 극복,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걸 복합적인 서사 구조를 통해 여러 상징으로 풀어냈다. 넘버「붉은 실」의 가사인 세상 모든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의 끝에 있다’는 <아가사>가 묘사한 우리의 내면이다. 자기 내면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보고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걸 인정하는 걸 너머 그것과 아슬하게 줄다리기를 하며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 덮어두고 부정하는 건 방법이 아니다. 인정과 적절한 수용을 아가사는 말한다. 이런 내면에 대한 탐구와 직면을 라비린토스와 미노타우로스이라는 소재에서 끌어내 뮤지컬의 서사로 확장한건 굉장한 노력의 결과물 이다. 창작 뮤지컬, 아니 뮤지컬에서 이만한 서사적 알레고리는 드물다.


  여성극의 관점에서도 <아가사>는 중요한 의미를 띈다. 중년 여성배우가 뮤지컬판에서 주연을 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그들을 주인공으로 쓰는 공연이 너무 적다. 중년 남성배우들은 최고 주가를 달릴 때, 하다못해 주인공의 아빠 역할을 할 때 중년여성배우들은 커리어가 뚝뚝 끊긴다. 그런 면에서 소극장-중대극장에 걸쳐서 중녀여성을 주인공으로 내건 <아가사>는 보물 같은 여성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작게나마 보여줬던 아가사와 엄마의 관계는 이 극에 물 흐르듯 모녀서사를 가미 시킨다. 안타깝게도 <아가사>는 15년 재연 이후에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중년 여성배우가 뮤지컬판에서 주연을 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아가사가 단점 없이 완벽했다는 건 아니다. 복잡한 서사 외에도 애매한 부분들이 있다. 아가사를 꽤 많이 관람 했지만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어디 있을까」에서 「미궁 속의 티타임」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그렇다. 레이몬드가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책'을 트릭으로 설치해서 용의자에게 다가간다. '책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지?' '책이 사라졌소.'  라는 경감의 대사로 유추했을 때 아치, 베스, 폴, 뉴먼은 실제로 책을 만졌고, 숨겼다. '서로에게 책을 넘겨준건 서로의 치부를 알고 있는 관계라는 거야.' 이 인물들이 서로 책을 주고 받으면서 한 번도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을까? 그 안을 임의로 채워 넣었다는 건가?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신경쓰이는 장면들이 몇몇 존재한다. 또한  아가사가 마지막으로 올라온 건 2015년이다. 4년은 관객이 변화할 수 있는 긴 시간이었다. 어찌됐던 살인과 동기를 다루고 있는 뮤지컬이니 분명 현재의 관객이 석연치 않아 할 부분도 존재 했을 것이다.(안타깝게도 기억이 흐릿해 콕 짚어 예시를 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가사가 다시 공연 됐으면 한다. 더 좋아질 부분이 남아 있던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가장 큰 문제는 공연이 올라와야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시기가 약간 빨랐던 공연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몇 년 사이 급속도로 증가한 여성극에 대한 관심과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주인공들을 보며 가끔씩 <아가사>를 떠올린다.


 


몇 년 사이 급속도로 증가한 여성극에 대한 관심과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주인공들을 보며 가끔씩 <아가사>를 떠올린다.

젠더프리와 <아가사>


   만약 다음번에 <아가사>를 만난다면 로이와 레이먼드를 여성으로 보고 싶은 개인적인 마음이다. 실제로 아가사는 딸이 있었다. 딸과의 일화나 설정을 빌려와 레이몬드라는 캐릭터로 치환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굳이 이러지 않더라도 여성배우였으면 좋겠다. 레이몬드는 아가사와 깊은 유대를 쌓는다. 레이몬드가 여성 캐릭터가 됐을 때, 아가사와 레이몬드는 유사모녀의 관계를 획득한다. <아가사>의 구성상 모자의 관계는 구성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모녀서사라면 얘기가 다르다. 아가사의 근간을 설명하는 넘버인  「나비의 꿈」와 유사모녀관계는 서로 상호작용 할 수 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슬픔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아가사의 내면에 레이몬드까지 영향을 받고, 아가사는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데 실패했지만 아가사, 즉 유사 어머니를 떠난 레이몬드는 그 악몽에 갇혀 지낸다. 결국 둘이 다시 마주하면서 아가사는 레이몬드를 보며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기대고 의지할 곳이었던 친어머니를 생각하며 아가사는 레이몬드에게 손을 다시 내밀게 된다. "내가 너의 붉은 실이 되어 줄게."라는 가사는 전과 다른 의미를 취득한다.


  로이가 아가사를 집어 삼키게 되면서 로이는 극 중에서 어쩔 수 없이 아가사를 위협하고 아가사 위에 서게 되는 장면들이 있다. 이런 부분들에서 남성배우는 여성 배우에게 큰 소리를 치거나 강압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극중 서사와 관련이 있는 행동일지라도 관객에겐 장면 하나 하나가 폭력적인 장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특히 2부 마지막으로 가면 로이가 아가사를 서서히 압박하면서 거의 20분 내내 소리를 치고 아가사를 몰아 붙인다. 보는 사람이 불편할 수 밖에 없는 미장센이 나온다.

  로이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로이가 남성 캐릭터여서 가능한 좋은 장면이 존재한다. 공연계에서 퀴어커플보다 더 보기 힘든 (설정상)젊은 남성과 중년 여성의 은근한 긴장감이 극 전체에 아우르면서 공연 자체를 매력적이게 만든다. 이 뿐만 아니라 공연은 등장부터 로이라는 젊은 남성이 이미 대 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에게 맨스플레인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로이의 거만한 맨스플레인이 2막까지 이어지다가, 로이의 정체가 밝혀진 뒤로는 로이의 태도가 더 공격적으로 변하면서 아가사를 압박하게 된다. 하지만 남성배우여서 로이의 행동 자체는 가스라이팅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 공연 안에서 아가사는 내면과 싸우는 캐릭터이다. 그렇기 떄문에 1막은 아가사를 고통받게 했던 상황들을 '재연'하는 데 아가사와 로이의 서사가 많이 쏠려 있다. 로이가 억지로 아가사에게 고통스러운 장면을 보여주고, 아가사는 그것들에 아파하고 부정해보려고도 하지만 결국 자신 안의 독을 인정하는 구성이다. 문제는 이러한 구성에서 어쩔 수 없이 로이가 더 대사량이 많거나 큰 무대 동선을 차지할 때가 있다. 처음에 '아가사'라는 캐릭터가 주연 캐릭터 치고 넘버가 많지 않다고 느꼈다. 근데 막상 세어보니 그렇게 적은 편도 아니었다. 왜 아가사의 넘버가 많지 않다고 느끼게 된 걸까. 아가사보다 메인 넘버를 더 많이 가져가고 무대 위 동선이 더욱 활발한 캐릭터가 바로 옆에 있어서는 아닐까. 이런 복합적인 부분이 만나 자칫하면 '아가사'가 메인이 되어야 할 장면조차 '로이'가 메인이 되기도 한다. 물론 로이는 어차피 아가사의 괴물이며, 아가사 자기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이는 더더욱 여성배우가 왔으면 한다. 여성배우가 맡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아가사의 젊은 시절을 떠올릴 수도 있다. 또한 앞서 말한 기존 무대 위의 폭력에 대한 느낌도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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