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스타전에 가기 전서부터 7월 21일 대전에서 열리는 한화와의 후반기 첫 경기는 가기로 되어 있었던 거였다. 이번 시즌 전국 9개 구장을 다 돌겠다는 원대한 계획에 미루어, 대전 구장은 놓칠 수 없었다. 내가 사는 고양서 비교적 가까워 접근성이 좋은 곳이기도 했고, 전반기 끄트머리서부터 기세를 탄 한화의 경기를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이번에도 내 영혼의 메이트 Y는 흔쾌히 동의했다.
KTX로 1시간 반이면 닿는 대전인데도, 아침 6시부터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빵의 도시 대전에서는 성심당에서 조식을 먹어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에서였다. 재작년부터 1년에 두 번은 대전을 찾고 있는 나는 자칭타칭 '대잘알'이다. 회사에 소속돼 있을 때도 이상하게 대전 출장이 잦았다. (재작년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소속 나로호의 여성 과학자들을 취재하러, 작년에는 교육부의 진로 관련 행사를 취재하러 갔었다,) 그리고 친애하는 에세이스트 K 언니와도 작년과 재작년 여름에 한 번씩 대전을 찾아 칼국수를 먹고 동네 서점엘 들르고 한밭수목원에 갔었다. 남들은 노잼 도시라는데, 나는 대전이 좋다. 빵으로 시작해서 칼국수로 끝나는 분식을 찾아 먹는 재미도 있고, 대전역 주변의 획 자체가 요즘 가게의 간판들과는 다른 꼬장꼬장한 간판들에서 주는 옛 정취가 좋고, 크고 작은 서점을 돌며 서점 주인의 취향을 느끼는 것도 좋았다. 드라마틱한 빅재미 대신, 나만 알아보는 잔재미가 가득한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낯익은 듯 낯선 도시 대전이 적당히 맞춤한 도시다.
대전역에서 도보 15분쯤 되는, 성심당 본점에서 Y와 조우했다. 서울에서 버스로 먼저 도착한 Y는 이미 조식 한 판을 해치운 뒤였다. 나는 빵으로 빚은 만두 같은 부추빵 하나와 산양 우유 한 병을 사와 조식으로 먹었다. 성심당에만 가면, 빵도 굉장한 공장제 제품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 오와 열을 맞춰 쟁반에 딱딱 줄세워진 빵들이 들고 남을 무한반복하는데, 그 뒤에선 하얀 빵모자를 쓴 직원들이 정신없이 빵을 만들고 있다. 그 많은 빵의 오와 열 앞에서 뭘 고를까 망설이다 오줌이 마려워지는 건,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성심당의 시그니처인 '튀소'(튀김소보로)부터 잠봉뵈르나 반미 같은 샌드위치까지 뭐하나 거르는 타선이 없을 정도로 맛있고 또 값싼 성심당이지만, 조식이라는 본분에 맞게 부추빵 딱 하나만 먹기로 한다. 부추빵의 속은 부추향이 솔솔 올라오는 게 차라리 중화풍에 가까워서, 먹고 나면 입 속에 중화요리의 잔향이 남는다. 산양 우유로 깔끔하게 씻어내렸다.
성심당의 도시 = 대전
조식을 먹고 나니 할 일이 없어졌다. 커피를 마시고자 해도, 근방에 일찍 문 여는 카페가 없어 난감했다. 2시간 가량 이 얘기 저 얘기를 주워섬기다가, 최근에 KTX매거진에 실린 '관사촌'이란 곳을 가보기로 했다. 관사촌이란 1901년부터 일제의 주도하에 철도 공사가 이뤄져 1904년 대전역이 생겼고, 그 인근 호수를 메워 대전역 동/남/북쪽에 만든 세 곳의 관사촌 중 끝끝내 살아남은 동쪽 관사촌을 말한다. 옛 건물, 옛 골목 특유의 정취가 남아 있어 카페, 식당들이 많이 들어서 이른바 '힙플'이 됐단다. 성심당 본점에서는 버스를 타고 2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내리자마자 Y가 눈을 뻐끔뻐끔 뜨더니 "아, 나 여기 와 봤어" 했다. "응 언제?" "전에 그 대전 사람이랑 소개팅할 때." 딱 1년 전 Y는 대전 남자랑 소개팅하러 대전에 간다고 했었고, 나는 서울 사는 사람을 자기네 동네로 부른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를 욕한 적이 있었다. 그 남자와 Y가 만났던 공간이 소제동, 관사촌이었던 모양이었다. Y의 추억이 새록새록한 카페와 식당을 지나 관사촌을 걸었다. 대문 색깔이 현란한, 야트막한 민가들 사이사이로 오래된 잎이 큰 나무가 서 있는 곳. 정취는 좋았으되 날이 너무 더워서 샌들을 신어 발등이 훤히 드러난 발이 실시간으로 직화 구이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더 둘러보려던 마음을 접고, 근교 농산물로 파스타를 만들어준다는 음식점 Found로 갔다.
Found에서는, 서천 김 페스토 파스타와 트러플 향이 진한 버섯 피자를 먹었다. 파스타는 서천 특산물 김을 구워 만든 김 페스토와 소라, 명란젓을 함께 먹는 음식이었다. 김 페스토는 오징어 먹물을 연상케 하는 꼬수운 맛이 크리미했고, 간간이 씹히는 소라가 쫄깃했다. 피자는 트러플 향에 하몽, 구운 버섯향이 조화를 이뤘다. 도우가 퐁신퐁신해서 신기했던 건 덤.
배를 채우고는 도보로 1분쯤 걸리는 찻집 '풍뉴가'에 갔다. 파운드 고객은 5% 할인을 해주는, 대나무숲 뷰가 아름다운 찻집이다. 커피는 없고 계절별로 이름을 붙인 아이스티가 유명한데 나는 여름을, Y는 겨울을 시켰다. 달달한 청에 담긴 용과씨가 어금니 사이에서 뭉개질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한 모금 마시고 주위 한 번 살피고, 한 모금 마시고 대나무숲 한 번 보면서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올드팝에 귀를 기울였다.
풍뉴가는 모든 것이 좋았지만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커피를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아침부터 커피 수혈을 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정신이 몽롱해 오는 게 다 카페인 금단 증상이 아닌가 싶었다. 일찍 한화 이글스 파크 근처로 전진 이동해서,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심신을 다잡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이글스파크 근처 카페 라이즈커피로스터스는 굉장히 괜찮은 곳이었다. 층고가 높은 데다 3층까지 좌석이 있고, 좌석 간 간격이 넓게 넓게 빠졌으며 창도 시원시원해서 비록 근처 학교 뷰일지언정 청신한 느낌을 줬다. 아이스 카페라뗴는 나란히 두 잔 시켜 수혈하듯 긴급히 빨아 마셨다. 그제사 세상이 보이고, 줄곧 내 근처를 맴돌던 졸음이 달아났다. 사위를 둘러보니, 다들 직관 전에 전초기지로 들른 야구팬들이었다. 삼삼오오 유니폼으로 갈아입는 축들도 보였다. 나도 조용히 화장실에 들러 환복을 완료했다. 다들 공중전화 부스에서 수트를 갈아입는 슈퍼맨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밖으로 비가 간헐적으로 부슬부슬 오고 있었고, 그 바람에 경기장에서 뭘 먹으며 응원하기는 힘들겠다는 각이 섰다. 블로그를 뒤져, 이글스파크 근처 맛집으로 '농민순대'가 유명하다는 걸 알게 됐다. 카페와는 3분 거리였다. 들어서자마자 돼지 내장 냄새가 내 몸을 감쌌다. 미리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걸 후회하게 만드는 냄새였다. 그러나 아직 5시도 되지 않은 시각에, 막창을 굽고 있는 인파들 중에서도 이미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한화 팬들이 보였고... 나는 고기까진 굽지 않을 건데 뭐 어떠랴란 생각이 들었다. 순대와 내장이 잔뜩 들어간 국밥 두 그릇을 먹고 1만 2000원을 냈다. 언빌리버블한 가격이었다.
'농민순대'의 6000원짜리 국밥. 건더기가 실하다.
드디어 입성한 이글스파크에는, 주황 빛깔의 독수리들이 너무 많았다. 불금이긴 해도, 평일 경기치고도 너무 많은 관중이란 생각이었고 그들이 티켓 수령처나 이글스샵 등을 모두 점령하고 있어 엄두가 안 날 수준이었다. 최근 한화의 상승세를 충청도민들이 얼마나 고대해왔는지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글스샵 입장은 포기하고 서성거리는데, 다이노스 구단 버스 앞에서 팬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류진욱, 김시훈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모바일 티켓으로 갈음할까 하다가, '그래도 지류 티켓의 낭만이 있지' 하며 20여분을 기다려 지류 티켓을 수령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입장. 이글스 파크는 듣던 대로 정말 작았다. 장점으로는 관중석과 뒤에 위치한 매점들이 바투 붙어 있어, 경기 중간에도 먹을 걸 사오기 참 편리하다는 것. 단점으로는 경기장 자체가 너무 작아서 좌석 앞뒤 양옆 다닥다닥 붙어 있어 운신의 폭이 매우 좁다는 것이다. 우리는 원정석인 3루의 내야 311 구역에 자리했는데, 코앞에 익스트림존이 있음을 감안해도 덕아웃 근처에서 몸을 푸는 NC 선수들과 바투 붙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맥 두 잔을 사와서 예열을 시작했다.
이 날의 경기는, 후반기 첫 경기이면서 '워크에식'으로 지적 받아 2군에 갔던 야수 박건우의 1군 복귀전이자 불세출의 에이스 페디의 등판 경기였다. 개인적으로는 올스타전 이후 첫 경기여서, 올스타전에서 NC와 함께 나눔팀이었던 한화 선수들이 눈에 익어서 전에 없던 내적 친밀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참이었다. 사직에서, 나 또한 "노시환~상적으로 날려줘요"를 열창하지 않았냔 말이다. 어딘가 모르게 운동 선수보다는 '친구 남편' 같은 인상을 주는 '미스터 올스타' 채은성이라던가. 원정 응원석인 3루 내야석 곳곳에도 홈팀인 한화 유니폼을 입은 팬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그들 유니폼엔 정근우, 김태균 같은 비교적 최근에 은퇴한 선수들부터 심지어 14년 전에 은퇴한 송진우 같은 레전드도 마킹돼 있었다. 창단 10년 남짓한 팀을 응원하는 사람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한화의 헤리티지랄까, 지역민들의 뿌리깊은 사랑이 느껴져 부러워졌다.나도 10년 뒤 20년 뒤, 지금의 손아섭 유니폼을 입고서 야구장을 찾게 될까.
경기 시작 직전, NC 선수들이 구령을 외치기 위해 모였다. 그 자리에 'NC의 3번 타자' 박건우가 있었다. '워크에식 논란'으로 지난 3일 1군에서 말소됐다가 18일 만에 1군 경기에 복귀한 참이었다. 반가움을 가득 담아 "박건우 화이팅"을 외쳤다.
3루 내야 311구역의 뷰
응원단이 오지 않는 경기라, 조용하리라던 기대와는 달리 3루 원정석은 꽤나 많은 NC팬들이 채우고 있었다. 어느 경기장엘 가도 한줌단 NC 응원을 주도하는 남성들이 있는데, 이날도 그랬다. 1회초, 1번타자부터 선발투수까지 호명하는 라인업송이 시작되려는 찰나, NC의 '리드오프' 손아섭이 한화 산체스의 2구를 '쾅'하고 받아쳤다. 파울 라인에 가까운 우측 담장을 넘는 솔로포였다. 홈런을 많이 치지 않는 타자인데다가, 라인업송을 부르기도 전에 전광석화같이 터져 나와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홈런'이었다. '오빠'의 의기양양한 주루를 보고 있자니, 오늘 경기가 순조롭게 풀릴 것 같다는 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4회초에도 권희동과 서호철의 안타에 이어 박석민의 중전 안타로 1점을 쉽게 올렸다.
이날 경기가 순조로울 것 같은 감은 오빠의 홈런도 홈런이거니와 우리의 1선발 페디에게서 왔다. 다승, 평균자책점에서 모두 1위를 거두며 '철벽 마운드'를 자랑하는 페디. 1회, 2회 모두 한화 타자들을 삼자범퇴로 정리해 예의 그 '에이스 침대' 같은 편안함을 자랑했다.
덕분에 에이스 침대에 엎드리고 앉은 고양이의 마음으로 경기를 관람했지만, 내 근처에 앉은 남자 아이의 마음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쯤 됐을까, 막 변성기가 온 듯한 한화 팬인 그는, 3회 정은원이 첫 안타를 치자 그 누구보다 기뻐하며 포효했다가 실점이 쌓이자 아예 "NC 이겨라" 하며 낙담을 했다. 이어 줄곧 NC 응원가를 따라 부르다가도 NC에서 뜬공, 땅볼이 나와 범퇴가 이어지면 하늘이 무너져라 고함을 질렀다. 알지, 저 기분 알지. 팀이 잘할 땐 벼락같이 응원하다가도, 못할 땐 'T발놈' 마냥 앞장서서 내 팀을 더 까고 싶어지는 마음. 그러나 내가 그 상황이면 모를까, 지켜보는 마음은 산란하기 짝이 없어서 그 아이의 지독한 텐션 전환에 나까지 휘말릴까 걱정이 됐다. 급히 츄러스를 꽂은 아이스크림을 사서, Y와 나눠 먹으며 도파민 지수를 올렸다.
'건야행야'(건강한 야구 행복한 야구)한 이닝이 이어지던 그 때, 한 통의 카톡이 왔다. "야구보러 대전까지 갔구나!" 하는 전 회사 선배. 아니, 나는 그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잔뜩 움츠러 들어 앞뒤 양옆을 살폈다. 방금 TV에 응원 방망이 치는 게 잡혔다는 전언이었다. TV에는 스케치북에 각종 현란한 문구를 쓴 분들만 잡히는 건 줄 알았는데 소박한 내 응원도 잡혔나보았다. 이윽고 선배가 보내온 영상에는 4회 초 박석민의 적시타 뒤 Y와 함께 환하게 웃으며 응원봉을 짝짝짝짝 치는 내가 담겨 있었다. 흥분이 범벅된 얼굴로. 야구 중계를 채널 돌려가며 보는 아빠가 부디 안 봤길, 하고 간절히 바랐다.
5회부터는 더욱 드라마틱했다. 윤형준의 투런포에 이어 박건우의 솔로포까지 백투백 홈런을 기록, 5-0까지 달아났다. '소총부대'라는 오명을 가진 NC에서 보기 드문 홈런 파티였다. '돌아온' 박건우의 홈런은 감격스러운 데가 있었다. 몸 이곳저곳의 불편함을 호소하며 경기 후반부 교체를 요청한 것으로 '워크에식 논란'이 터져 2군으로 내려갔다 올라온 그. 팬들은 강인권 감독의 발언으로 상황을 유추했지만, 정작 선수에게는 입이 없어 그의 해명은 들을 수가 없었다. 강 감독의 말이 A부터 Z까지 사실이래도, 이전 팀이었던 두산에서도 워크에식을 이유로 2군으로 강등됐던 전례까지 더해 마녀사냥식의 보도가 이어지는 게 팬으로서는 가슴 아픈 것이 사실이었다. 그 모든 설움을 씻어내리는 홈런포여서, 어둑해져가는 하늘을 수놓은 그 공의 궤적을 바라보는 일이 가슴에 벅찼다.
7회말, 한화는 반격에 나섰다. 닉 윌리엄스가 1타점 적시타를, '대전 아이돌' 정은원이 2타점 2루타를 뽑아내 8-3까지 따라 붙었다. 6과 3분의 2이닝을 소화한 NC의 선발 페디도 김영규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화가 한 점도 뽑아내지 못하던 7회말 직전, 이미 한화팬들 다수는 경기장을 떠난 뒤였다. 8점이 적은 점수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7회 퇴장은 너무 빠르지 않나 싶었는데 적어도 3루 원정응원석 사이사이 앉아 있던 한화팬들 20여명은 그 때 우르르 자리를 떴다. 우리 옆에 앉아서 생목으로 한화를 응원했다, NC를 응원했다 했던 그 학생 팬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의 퇴장과 함께, 나와 Y는 에이스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고양이 같은 마음이 됐다.
이날 경기는 9-3, NC의 승리로 끝났다. 시종일관 점수가 앞섰기 때문에, 그 저녁 새 먹은 건 맥주 한 잔과 츄러스 아이스크림 밖에 없어도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포만감이 긴 경기였다. 선수들 퇴근길까지 야무지게 챙기고, 이글스샵에 들러 한화의 여러 굿즈들을 구경했다. '빙그레 이글스' 시절의 오렌지색 레트로 유니폼이 탐났지만(나는 각 구단 레트로 유니폼 성애자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지름까지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문동주, 정은원은 특정 유니폼에 붙이는 마킹 키트가 '품절'이라고 매장 내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었다.
Y와 나는 호우 피해로 1시간 가까이 연착된 KTX를 느긋하게 타고 올라왔다. 집에 오니 새벽 1시도 넘어 있었지만, 폭발하는 아드레날린으로 피곤한 줄도 몰랐다.
2023년 7월 22일(토)
일어나보니 오전 10시였다. 에어컨이 없는 안방이라, 대기의 수분은 다 빨아들인 듯한 무거운 몸을 하고서 잠에서 깼다. 주말 아침부터도 Y와 카카오톡으로 야구 토크는 이어졌다. 새벽 집으로 오던 길에 사왔던 육개장 작은 사발을 아점으로 끓여먹었다.
그러고 아침새 새로 뜬 엔튜브를 봤다. 엔튜브는 NC에서 하는 구단 차원의 유튜브다. KBO 각 팀들마다 갸티비(KIA), 큠튜브(키움), 라이온즈TV(삼성) 등의 공식 유튜브를 운영하면서 선수들의 신변잡기나 경기 하이라이트를 전한다. '신상' 엔튜브에는 어제 경기의 하이라이트에 앞서 투수조들이 펑고 훈련을 받는 장면이 나왔다. '투수들도 펑고(타구를 받아내는 수비연습)를 하는구나' 하며 라면 면발을 넘기는데, 선수들이 타구를 글러브로 받아내며 행복해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야구장에서 만날 보는(이때 이미 나의 직관 횟수는 13회에 육박했다) 선수들의 얼굴인데도, 가슴을 훅 후벼파는 천진함이 있었다. Y의 표현에 따르면 '가슴이 뻐근해지는' 장면이었다.
뻐근해진 가슴을 가까스로 추스리려 노력하며, 우리집 냥이들과 한바탕 놀고 있었다. 어제 하루종일 집을 비운 엄마를, 애기들은 원망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놀면서 BGM처럼 엔튜브를 틀어놨는데 거기서 계속 깔깔대는 웃음 소리가 들리고… '아, 오늘은 혹시 '익존'에 자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티켓링크에 들어갔다.
어제 나는 분명히 봤다. 이글스파크는 '익사이팅존'이 상석이라는 사실을. 1, 3루 파울라인에 붙어선 익사이팅존은 선수들과 보다 가깝게 호흡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격이 3만원(잠실 기준)을 호가하는 상석이다. 그러나 잠실만 해도 익존이 1, 3루 베이스 한참 뒤에 위치한데다 땅으로 움푹 꺼져 있어 주로 베이스코치들의 뒷태만 보고 마운드나 타석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글스파크의 익존은 달랐다. 보다 내야와 가까워서 주자들의 기민한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또한 불펜이 외야에 있는 구장의 특성상 불펜 투수들이 등판 직전 3루 근처, 익존 그물망 바로 앞에서 몸을 푸는 장면도 나는 어제 분명히 봤다. 만약에 익존 표를 구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틀 연속… 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 때부터 강태공의 마음으로(강태공이라기엔 영 한가롭지 않게 낚싯대를 미친듯이 흔들어제끼는 낚싯꾼의 마음으로), 예매처인 티켓링크 어플을 '광클'했다. 3루 익존 중에서도 가장 내야에 붙은, 306블록에 자리가 난다면 충분히 다시 대전행을 고려할만 했다. 306블록 맨 뒤에 딱 한 자리가 나 있었다. 일단 예매. 그러고도 Y와의 동행을 도모하기 위해 연석자리가 없는지를 계속 체크했다. 새로고침, 새로고침, 새로고침, 새로고침… 30분 가량 두들겼나. 기적같이 뾰로롱, 연석이 하나 나왔다. 일단 선점해놓고, 눈을 한 번 비볐다. 진짠가? 정말로 2023년 7월 22일 NC-한화전의 3루 익존 306블록의 표가 맞았다. Y에게 전화를 걸었고, 1시간 뒤 우리는 어느덧 대전으로 가는 KTX에 올라 있었다.
2틀 연속 또글스파크. 토요일엔 비가 내렸다.
이날의 경기는 익존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한다. 306블록의 앞에서 네 번째, 통로석을 점한 우리는 "이렇게 가깝다고?"를 연발했다. 정말 바로 눈 앞에서 NC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좌우를 둘러보니 익존에는 다들 기다란 대포카메라를 소지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 않고 선수들을 찍고 있었다. 나와 Y에게 그런 장비일랑 없었으므로, 우리의 소총(갤럭시)을 들고 열심히 선수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3루 익사이팅존 306구역의 뷰.
어제보다 30분 이른 오후 6시, 경기가 시작됐다. 시종일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에도, 안 쓰기에도 뭣한 정도로. 우산을 쓰자 했더니 앞에 앉은 부자(父子)가 쓴 우산 때문에 내 시야가 심각하게 가려지고 있었다. 내가 우산을 쓰면 뒷 사람도 그러려나 싶어 우산은 접고 대신 모자를 썼다. 옆 블록에는 'NC DINOS'가 적힌 하늘색 우비를 입은 팬들이 있어 나의 부러움을 샀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양팀의 선발 투수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NC의 와이드너 vs 한화의 페냐. "우리나라엔 페냐처럼 체인지업을 던지는 투수가 없"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상위 22%에 해당하는 구종"이라는 한화 최원호 감독의 자신감처럼, 페냐의 공에 NC의 타자들이 속수무책이었다. 거기다 피칭할 때마다 거칠게 흩날리는 그 레게머리가, 야구를 못할 리가 없는(또는 못할 수가 없는) MLB의 강속구 투수로 보였다. 오직 마틴만이 2회 페냐의 초구를 받아쳐 우월 홈런을 터뜨렸다. 반면 경기마다 기복이 심한 와이드너의 투구는 평이해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4이닝 3실점에 그쳤다. 어제의 에이스 침대는 어디 가고 울렁울렁 물침대가 와 있었다.
5회가 되어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데님 반바지가 젖어 엉덩이께도 축축해졌다. 점수는 1-3 한화의 리드. 아까부터 계속 우산을 높이 들어 내 시야를 방해했던 아저씨는 이제 우천 콜드를 외치고 있었다. 정말로 그 말대로 될까 초조해왔다. 4회 정은원의 솔로포 이후 한화 응원석의 분위기는 비에도 아랑곳 않고 폭발 직전이었다. 올스타전에서는 들었지만 어제 경기에선 듣지 못했던 한화의 응원가 "나는 행복합니다~ 이글스라 행복합니다~"가 극적으로 울려퍼졌다. 너의 행복은 나의 불행. 야구장의 잔혹한 '제로썸 게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빗방울로 가느다랗게 떨리는 몸과 함께.
NC가 압도했던 전날 경기와 달리, 이날은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하며 엎치락뒤치락했다. NC는 6회에 2점, 7회에 1점을 보태며 4-3 역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7회가 고비였다. 무사 만루에 타자는 '홈런 1위' 노시환이었다. "노시환~상적으로 날려줘요"가 내 귀엔 "노시환~장적으로"로 들릴 판이었다. 전날, 나에게 TV 중계에 잡혔음을 알렸던 한화 골수팬인 선배에게, 한화 팬들의 노시환 응원가 떼창 장면을 찍어 보냈다. 노시환은 다행히도(?) 병살을 쳤지만, 3루 주자 이도윤이 홈으로 들어오며 4-4 동점이 됐다.
그리고 8회말. 2사 만루에 이용찬이 떴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누르고 마운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풀카운트에 파울볼인줄 알았던 공이 포수 박세혁의 글러브를 맞고 굴절돼 흐르고, 3루 주자 정은원이 홈으로 쇄도해 4-5 역전이 됐다. NC는 공이 배트에 맞았다며 항의했지만, 비디오 판독 결과는 '아니올시다' 였다. 파울이 아니라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 포일'이었던 것이다. 아오. 여전히 우산을 높게 든 아저씨가 기세 등등하게 외치는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을 듣자하니, 하늘이 무심하고 박세혁의 글러브가 무심하고… 세상사 모든 게 무심해 보였다.
그러고 9회초, 9번 타자 김주원부터 시작한 NC의 공격. 1루 근처에서 잔디를 맞고 갑작스레 높게 튀어오른 김주원의 타구를 한화가 침착히 처리했다. 이어지는 팬들에겐 설렘 그 자체인(타팀에겐 공포일) NC의 상위타선. 손아섭이 안타로 출루했고, 박민우가 선행 주자 손아섭을 죽였으되 본인은 출루했다. 이어 박건우의 우전 안타로 2사 1, 3루가 됐다. 다음은 마틴. 기적을 바랐지만 '오늘이 기적일 순 없잖아' 하는 마음으로, 약간은 심상한 마음으로(그래야 내 마음이 안 다치니까) 타석을 바라봤다. 그 때였다. 쾅. 한화의 마무리 박상원의 포크볼을 마틴이 우아하게 받아쳤다. 맞자마자 홈런임을 직감한 듯, 마틴은 지그시 공의 궤적을 바라봤고 야구 지식이 일천한 나도 그것은 홈런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Y와 얼싸안고 기립해 포효했다. 착착 홈으로 들어오는 주자들과 타자 마틴. 동료들과 몇 번을 얼싸안은 끝에 박민우와 세리머니를 하는 마틴. 장타를 쾅쾅 터뜨리는 타팀 외국인 타자에 견줘 소박한 타율과 결정적일 때의 헛스윙으로 '마틴 고 홈' 소리를 줄곧 들었던 마틴. 올스타전에서 여권을 불사르는 퍼포먼스마저 했던 페디와 달리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던 마틴이, 한 경기 두 홈런의 주인공이자 끝내기 홈런의 히어로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환히 웃으며 홈으로 들어오는 마틴을 보며, 나도 Y도 함께 반성했다. 소크라테스랑 비교해서 미안해, 오스틴이랑 비교해서 미안해. 아 맞다, 피렐라하고도 비교했었던 거 같아.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마틴.
그래도 훗날을 기대하며 '기다려주는' 내국인 선수들과 달리 '돈값'에 더욱 집착했던 우리는 외국인 선수들에 얼마나 냉정했던가. 외국인 선수는 팀 당 3명 밖에 둘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금전적 보수를 받고 복무하는 군인'이란 뜻의 '용병'이란 말처럼, 외국인 선수를 얼마나 소비재처럼 대했는지를 나는 두고두고 반성했다.(하필 그 반성이 마틴이 잘할 때 터져나와서 미안하지만, 나도 인간이었어 마틴. 흑흑)
'포일'로 역전 당할 때만 해도, 이날 9회말은 없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9회말은 있었고 이용찬도 경기를 안정적으로 마무리했다. 극적인 역전승이었다. 관중들을 향해 인사하는 선수들을 향해 진심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선수들 퇴근길도 꼬박 지켜 비록 승리투수는 되지 못했지만 고생한 와이드너에게 "I love you so much"를 외쳤다. 집으로 오는 길엔 Y와 "우린 얻을 걸 다 얻었다"며 서로의 어깨를 다독였다. '2틀 2대전'의 비효율이 하나도 수고스럽지 않았다. 다음 직관까지 또 며칠을 잘 살 수 있는 기운을 얻었기 때문에.